안녕? 너는 안녕하고 있어?
복슬복슬 첫눈이 내립니다. 사실 첫눈은 아닌데 눈 때문에 괜히 고양된 감정이 하얗게 덮인 세상을 새롭게 맞이합니다. 새롭게 보이는 풍경, 새롭게 들리는 목소리, 새롭게 느껴지는 온기.
네, 올 겨울 첫눈이 지금 옵니다.
“그게 제 실리예요.” 실리를 묻는 질문에서 원대한 꿈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제가 그 실리를 얻기 위해 유랑님이 꼭 잘 돼야 해요.” 어둠이 드리운 창밖에는 새하얀 눈이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자기 주변 모두가 잘 되는 것에 큰 가치를 둔다는 말은 살면서 드물게 들어왔습니다. 저 역시 나름 하늘 아래 아주 부끄럽진 않을 꿈을 가지고 있고요. 하지만 당장의 실리를 묻는 자리에서 원대한 꿈 이야기를 들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꽃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서 전체로 수정되는 열매 이야기를 들을 거라고는 정말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발이 있는 곳에 눈도 있는 법입니다. 제 있는 자리에서 보이는 게 있다면, 반대로 제 자리에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발신자 쪽에 가까이 있으면 발신자의 고충은 이해하지만, 수신자의 고충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수신자 쪽에 가까이 있으면 발신자의 고충을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나무를 유의 깊게 보는 중에는 숲을 넓게 보기 어렵고, 숲을 넓게 보는 중에는 나무 하나를 유의 깊게 보기 어려움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개인을 살필수록 전체를 보기 어렵고, 전체를 살필수록 개인을 등한하기 쉽습니다. 큰 것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작은 것을 포기해야 하고, 작은 것을 보듬기 위해서는 큰 걸음을 포기해야 합니다. 실리를 따지기 위해서는 꿈을 잠시 접어야 하고, 꿈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실리를 잠시 덮어둬야 합니다. 어쩌면 이건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책상에서 펜대만 굴릴 때는 모르겠지만, 현장에서 손과 발이 되는 순간 바로 알 수 있는 아주 쉬운 이치입니다.
이런 사실은 거부하고 부정하는 것보다 빠르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라 배웠습니다. 둘 사이 어느 쪽에 발을 더 둘 것인지, 둘 사이 어느 정도 거리에 나의 자리를 둘 것인지 빠르게 정하는 것이 지혜라 배웠습니다. 그게 설혹 흔들려도 흔들리지 않는 법이라 여겨왔습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진동이 제 머리를 아득하게 만든 것일까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 대화를 곱씹기 위해 발을 잠시 멈췄습니다. 세차게 낙하하는 눈이 금세 제 머리 위에 소복이, 어깨 위에 소복이, 얇게 드러난 귀 위에도 소복이 쌓였습니다. 소복이 쌓인 눈이 제 얇은 귀를 움켜잡은 것인지, 귀 위에 내려앉은 새하얀 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안녕?” “너는 안녕하고 있어?”
보면, 세상을 차갑게 보기로 결심한 과학자들이 어떤 경우 더 따뜻한 말을 건네곤 합니다.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들은 우리가 죽으면 산산이 나누어져 이후 나무도 되고, 고양이도 되고, 연필도 되고, 별도 된다지요? 지금 우리 몸을 이루는 원자 역시 이전에 나무에게서 왔을 수도 있고, 별에서 왔을 수도 있고, 고양이에게서 왔을 수도 있답니다.
이 말은 나 이전에 나는 나 모르는 너였을 수도 있고, 나 이후에 나는 나 모르는 너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 말은 나와 네가, 나와 저 고양이가, 나와 저 나무가, 나와 저 산이, 나와 저 별이 미세하게나마 상관이 있었고, 미세하게나마 상관이 있고, 미세하게나마 상관이 있을 거라는 얘기입니다.
따뜻한 과학과 흔들리는 이치가 마음을 울려 꿈이라도 꾸는 것인지요. 이미 쌓인 눈 위로 낙하하여 조금은 천천히 녹게 된 운 좋은 눈을 골라 말을 건넵니다. “사실 우리는 같은 언어로 쓰였다는데. 어쩌면 지금의 나는 이전의 너에게서 왔을 수도, 또 지금의 나는 훗날 새로운 너의 일부가 될 수도 있겠구나.” “너와 내가 상관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내가 이 모든 것과 상관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듯 저는 잠시 포슬히 낙하하는 눈이 되었습니다. 아니, 눈도 되고, 산도 되고, 고양이도 되고, 햇살도 되었습니다.
꿈속에선 눈이 녹습니다. 눈이 녹는 것인데 빙하가 녹습니다. 눈이 녹는 것인데 한 여름 햇살의 싱그러움이 녹습니다. 눈이 녹는 것인데 함께 꿈을 도모하는 청년들의 총기가 녹고, 조용한 카페 속 아늑한 시간들이 녹습니다. 눈이 녹는 것인데 제 이웃의 다정한 웃음이 녹고, 눈이 녹는 것인데 제 사랑하는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몸짓이 녹습니다. 눈이 녹는데 그들이 녹습니다. 눈이 녹는데 저 역시 녹습니다. 눈이 녹는데. 그저 눈이 녹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꿈에서 깬 현실은 여전히 제 몸 하나가 녹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눈이 녹는 속도만큼, 빙하가 녹는 속도만큼, 싱그러운 햇살과 아늑한 시간들이 녹는 속도만큼, 제 몸 역시 현실의 풍파에 녹아내리기 바쁘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제 발은 저 개인이라는 좁은 자리에 더 가까이 있지 않겠습니까. 모두를 위한 열매도, 전체의 뜻으로 되어야 하는 수정도, 만물이 하나라는 연관성도, 먼저는 제 몸 하나 꽃 피워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전체와의 관련성을 깊이 자각하고 싶어도 이 한 몸 건사하기 쉽지 않은 게 우리가 맞은 오늘 아니겠습니까. 개인과 전체의 거리는 가깝게 느껴지는 듯하지만 실상은 언제나 먼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의 풍파와 같이 날이 부쩍 차가워진 요즘, 저는 자주 밖으로 나가 달립니다. 이상하게 달릴 땐 방향 없이 그저 반항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대뜸 ‘저 하나 일단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아뢰다가도 ‘내가 곧 우리’라는 소리에 한숨 푹 내쉬고, 저는 녹기 싫다 저항하다가도 쟤 역시 녹아내리는 걸 보기 싫어 고개를 떨굽니다. 그렇게 왼발에 맞추어 왼쪽에 반항하고 오른발에 맞추어 오른쪽에 투쟁하다 보면, 추운 날이 무색하게 어느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습니다. 그때쯤 저는 고개를 들고 이곳저곳에 방향 없이 저항하던 입을 다뭅니다. 그리고는 이전에 하나였을지 모르는 나이자 우리이자 너희를 바라보며 인사합니다. “안녕?” “너는 안녕하고 있니?” 그럼 생기도 잃고 이파리도 잃은 나무들이 줄지어 저의 양발 달리기를 응원합니다. “안녕?” “너는 안녕하고 있어?”
“우리, 함께 안녕할 수 있을까?”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지만, 그것은 자의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곧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롬8:19-23)
**莊周夢爲胡蝶 (장주몽위호접), 胡蝶之夢(호접지몽)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어 즐기다 깨어나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를 묻는다. 꿈이 현실인가? 현실이 꿈인가?”(莊子, 齊物論)(장자, 재물론)
: ‘나와 세계가 바뀔 수 있음’을 체험적으로 보여줌.
***天地與我並生,萬物與我為一 (천지여아병생, 만물여아위일)
“하늘과 땅이 나와 함께 생겨났고, 만물이 나와 하나이다.”(莊子, 齊物論)(장자, 재물론)
: 자연과 인간,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동양 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