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우러러, 땅을 디디어

하늘의 눈동자엔 무엇이 맺혀있을까

by JACOB


오늘은 하늘이 맑네요. 구름이 조금 있고요. 조만간 비 소식이 있는지 구름이 제법 빠르게 움직입니다. 새도 짝지어 날아가네요.


여러분은 하늘을 자주 보며 살고 있습니까? 어느 천체 과학자는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인간다움 중에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직립 보행이 시작된 때부터 자연스럽게 펴진 허리 덕에 쉽게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답니다. 그래서 인간의 인간다움은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라나요. 직립 보행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존재까지. 너무 천체 과학자스러운 말이었을까요? 저는 꽤 감동적이었습니다.



가끔 작은 배낭 하나로 포르투갈을 여행했던 때가 떠오릅니다. 그중 롱 루이스 1세 다리 위에서 멍하니 시선을 고르고 고르던 포루투(Porto)의 시간이 유독 그립다랄까요. 강에 가깝기 전부터 길게 뻗은 다리 덕에 시작 부분에 서 있으면 직각으로 도심의 분주한 모습을 내려다볼 수 있었습니다. 약 50~80m 높이에서 꽤 많은 것을 내려다볼 수 있었죠. 차도와 인도, 유모차와 자전거, 상점과 벤치, 택시와 승용차, 연인과 가족, 상인과 관광객, 행인과 강아지 등 많은 것들의 정수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사진이나 영상을 찍으면 드론으로 찍은 것이냐는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다리 위에서 강보다 여러 정수리의 노다님을 보는 게 좋았습니다. 강바람을 맞으며 1시간은 넉넉하게 보낼 수 있었죠. 위에서 그렇게 사람들이 노다니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면 마음은 고요히 흘렀습니다. 이리저리 마구 움직이며 대화하고 부딪히고 부대끼는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그저 무용했고, 무용했기에 귀여웠습니다. 정형화되지 않고 어지러히 움직였지만 소란스럽지 않고 신묘막측했습니다. 어떻게 이 작은 이들이 살내음을 만들며 살고 있는 것인지, 어떻게 이 작은 이들이 만물의 척도가 될 수 있는 것인지, 어떻게 이 작은 이들이 땅을 일궈내며 살 수 있는 것인지 마냥 경이로웠습니다.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는가.’ 분주한 사람들과 얽히고설키면서 이것저것 따지고 있는 연말입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몸 비비며 조급함과 다그침을 일삼고 있습니다. 저 역시 무엇에 씌었는지 땅에 떨어진 먹이 하나 더 쥐고 싶어 야단스럽습니다. 이제 도시 속 비둘기는 시골의 닭보다 날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나요? 아무리 앞서 향해도, 옆을 뛰어도, 차를 타고 달려도 도심 속 비둘기는 그저 뒤뚱뒤뚱 걸어 비켜갑니다. 날개를 영 피지 않습니다. 뒤룩뒤룩 욕망으로 살찐 몸을 움직여 다음 먹이를 향해 걸어갈 뿐입니다. 먹이를 찾는 고개는 바삐 움직입니다. 그러나 날개는 날갯짓을 잃었습니다. 그 모습이 날기를 잊어버린, 하늘의 꿈과 하늘의 눈을 잃어버린 도심 속 인간과 친근해 보입니다.

그런 비둘기가 간만에 하늘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고개를 완전히 젖혀야 할 만큼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비둘기를 따라 저의 시선도 고개 끝 하늘에 서니 괜히 얼결에 인간다움을 실현하게 됐습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습니다. 하늘이 볼 때 우리 역시 뒤룩뒤룩 욕망으로 살찐 몸을 힘겹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까요. 훨훨 날 수 있는 하늘의 세계를 잊은 채 다음 먹이만을 향해 땅을 뒤뚱뒤뚱 걸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까요. 나름의 치열함이 그저 한심해 보일까요. 먹이를 찾아 조급하게 움직이는 고개와 더 얻지 못해 스스로를 다그치는 불친절이 그저 기가 차 보일까요.



캐나다에 있을 적인가요. 아니면 도서관을 오갔을 적인가요.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비슷한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보다 불현듯 하늘의 시선을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저에겐 참 충격적으로 다가왔었는데, 하늘은 하늘 스스로를 바라보지 않더라고요. 인간은 큰 뜻을 품는답시고, 하늘을 위한답시고, 하늘의 뜻을 이룬답시고, 하늘은 하늘이라고, 하늘을 불경하게 대하는 자들을 숙청하며 “하늘! 하늘!” 노래를 부르지만, 정작 하늘은 하늘 스스로를 찬양하기보다 언제나 땅에 시선을 두고 있더라고요. 우리 역시 높은 곳에 올라서면 땅을 널리 보게 되지 않습니까? 높은 곳에 올라서까지 높은 하늘을 올려보지 않습니다. 하늘의 시선을 잠시 빌리는 우리조차도 높은 곳에선 하늘이 아닌 땅을 널리 보게 되죠. 그리고 꽤 높은 하늘에서 땅을 널리 바라보고 있으면, 하늘의 시선대로 땅에서 부대끼며 바장이는 모든 움직임이 그저 기특하고 옹골찬 인생살이로 보입니다.


땅에 발을 붙인 운명이라고 비좁은 땅의 마음까지 품고 살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너른 하늘의 마음을 품는 게 비좁은 땅을 넉넉하게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요. 어쩌면 하늘 마음과 땅 마음을 굳이 구분 지을 필요가 없을 것 같기도 하고요. 어차피 하늘은 땅에 시선을 두고 있고, 하늘은 땅에 몸을 기울이고 있고, 하늘은 땅의 편에 서 있으니 말입니다. 하늘을 본다는 군상 중에 강경하게 신본주의(神本主義)를 외치며 인본주의(人本主義)를 배척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제 보기엔 신본주의의 끝과 인본주의의 끝은 잇닿아 있는 듯 보이는데 말입니다. 하늘을 외치느라 땅의 아픔을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정작 하늘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습니다. 하늘은 땅 편에 섭니다. 하늘은 땅을 봅니다. 하늘은 땅을 향해 내려옵니다. 하늘은 땅을 변호합니다. 하늘의 눈동자를 자세히 보면 찰랑이듯 우리가 맺혀 있습니다.


땅의 시선으로 우리를 둘러보면 여전히 꾸덕한 욕망과 절망의 비린내를 흠씬 풍겨오지만, 하늘의 눈을 통해 우리를 널리 보면 그래도 신묘막측한 게 이따금씩 신비와 경이를 만들어 내는 존재로 보입니다. 그거면 족하지 않습니까? 그거면 괜찮지 않습니까? 그게 그 고귀하다는 생명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인간다움을 실현하기 위해 하늘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답기 위해 하늘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다움을 아주 잃지 않기 위해 하늘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늘 눈동자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이따금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늘과 눈 맞추고 난 후 땅을 위해 하늘의 편에 서고 싶어졌습니다. 아니, 하늘을 위해 땅의 편에 서고 싶어졌습니다. 아니, 애초에 하늘은 어느 편에 서 있는 걸까요? 하늘의 편에 서겠다는 것은 하늘 쪽에 서겠다는 걸까요 땅 쪽에 서겠다는 걸까요? 여기도 잇닿아 있는 걸까요?



저는 사람 편에 선 하늘을 보면서 하늘과 같은 편에 서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 주님께서는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그에게 존귀하고 영화로운 왕관을 씌워 주셨습니다.”(시8:4-5)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온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다.”(눅2:10)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1:23)

***天視自我民視,天聽自我民聽. (천시자아민시, 천청자아민청)

“하늘은 우리 백성의 눈으로 보고, 하늘은 우리 백성의 귀로 듣는다.”(孟子, 梁惠王 上)(맹자, 왕혜왕 상)

: 본 뜻과는 다르지만, 하늘이 땅의 편에 선다는 뜻으로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