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첫 번째 자유여행
이번 편에 쓸 여행을 고르는데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너무 옛날 여행들만 소환해서 제 나이만 밝히는 꼴이 되는 거 같아서 최근 여행을 하나 더 올려볼까 했으나 그래도 개인적인 여행의 경험뿐 아니라 우리나라 해외여행의 역사를 짚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 처음 했던 해외여행의 기억을 소환하길 했습니다. 다만 이 여행의 사진들은 디지털로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앨범에서 찾아서 일일이 스캔을 하는 노력이 한층 깃들여졌다는 점 먼저 말씀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TMI: 중간까지 쓰다가 저장 안 하고 날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쓰는 중)
198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에서 해외여행을 가려면 사업이나 외교 등 특별한 목적을 가진 경우 나라의 허락을 받고 갈 수 있었다는 거 아시는 분은 제 또래인 것 같습니다. 1983년에 관광 목적의 해외여행이 허용되었을 때는 50세 이상의 국민이 1인당 200만 원을 1년간 예치해야만 단수 여권 발급이 되었다고 해요. 이후 1988년 올림픽을 계기로 1989년부터 해외여행이 전면 자유화되었지만 그때도 외국 여행을 가기 위해 여권을 발급받으려면 소양교육이라는 일종의 해외여행 예비 과정을 완료해야 했었고 저도 대학로에 있던 예지원에서 하루 종일 교육을 받았었습니다.
소양교육운 해외에서 북한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납북 사례나 조총련 활동 등 반공교육이 메인이었지만 그 외에도 해외 호텔에서 잠옷만 입고 돌아다니지 말라, 비행기에서 신발 벗고 맨발로 돌아다니지 말라 등 해외여행 예절에 대한 내용들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해외여행 자유화로 크게 늘어났던 것이 해외 어학연수와 배낭여행이었고 많은 친구들이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유럽으로 떠났던 것 같습니다. 저는 사실 혼자 오랜 기간 멀리 여행하는 것은 아직 두려움이 있었기에 배낭여행보다는 그 당시 많은 대학교에서 기획하여 진행했던 여름방학 해외 언어 연수를 선택했습니다. 1990년 우리 대학에서 진행한 여름 영어 캠프는 7월 8일 출발하여 8월 26일 귀국하는 7주짜리 프로그램으로 5주간 UC 버클리에 부속된 어학연수기관에서 영어 수업을 받고 10일간 미국 서부와 하와이를 여행하는 일정으로 진행되었고 이 것이 저의 첫 번째 해외여행입니다.
UC Berkeley Extention은 버클리 대학교 부속의 평생교육기관 같은 프로그램으로 다양한 코스의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당시 저희는 여름 방학으로 학생들이 떠난 기숙사를 숙소로 제공받았고 학교 식당에서 식사도 하고 도서관도 이용할 수 있어서 정말 버클리 대학교 안에서 캠퍼스 라이프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지금 다시 되새겨보니 딸아이 대학교 때도 한 번 보내줄 걸 그랬다는 싶어요. 대학 생활동안 데뷔 준비하고 활동하느라 학생다운 여름방학을 보내지 못한 딸에게 괜히 미안해지기도 하네요.
도착해서 가장 먼저 기숙사를 배정받았고 그다음 날 아침 레벨테스트를 받았습니다. 레벨에 따라서 각자의 클래스에서 수업을 받았습니다. 최근에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성동일 씨와 김광규 씨 등 연예인들이 영국 랭귀지 스쿨에 가서 영어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저희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서 레벨에 맞는 학급을 배정받았습니다. 저는 당시 가장 높은 레벨 6을 받아서 다른 여러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수업을 받게 되었습니다.
낮에는 수업을 듣고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밤에는 같이 연수를 갔던 친구들끼리 기숙사의 큰 홀에 모여서 술도 마시고 레크리에이션도 하면서 3주간의 연수를 재미있게 보냈어요. 또 주말을 이용해서 가까운 곳을 여행하기도 했는데 그중 한 곳이 이서진 씨가 유튜브에서 나영석 PD와 방문했던 미국 서부에서 가장 유명한 놀이공원 중 하나인 Six Flags Magic Mountain입니다.
https://www.sixflags.com/magicmountain
그 당시 탔던 놀이기구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이 Lex Luthor였습니다. 125미터 상공까지 수직 상승했다가 중력의 힘으로 그대로 떨어지는 어트랙션인데요. 우리가 탔을 때는 네모난 엘리베이터 박스 같은 것을 철판 바닥이 밀고 올라가서 정상에 도착하면 바닥이 빠지면서 그대로 떨어지는 형태였는데 지금은 사진을 보니 자이로드롭 같은 의자로 교체되었네요. 유리 상자에 앉아 있다가 밑판이 빠져서 120미터 아래 땅이 드러났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는데 지금은 그런 놀람은 못 느낄 거 같습니다. 또 기억나는 어트렉션은 급류 타기 같은 Roaring Rapids로 우리나라에서는 비슷한 놀이기구를 본 적이 없는 듯한데 후룸라이드의 계곡버전이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 듯합니다. 후룸라이드가 레일을 따라 움직이는 거라면 이 어트랙션은 계곡처럼 만들어진 코스를 커다란 타이어 같은 라이드를 타고 돌아가는 것으로 규모가 엄청나게 큽니다. 또한 튀는 물의 양도 상상을 초월하는데 우비나 덮을 것도 없이 온전히 맨몸으로 그 물을 맞아야 하다 보니 내릴 때는 완전히 물에 빠진 생쥐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타야만 했는데 그 당시는 미처 몰랐답니다.
샌프란시스코는 주말마다 나갔던 거 같아요. 금문교는 물론이고 골든게이트 파크, 피셔맨스 워프, 트윈픽스, 그레이스 대성당, 미션 디스트릭트, 트램 등 관광지들을 3주에 걸쳐서 두루두루 돌아다녔죠. 당시 사진들을 스캔하면서 보니 요즘 찍은 여행 사진과 많이 다르네요. 디지털카메라가 아닌 필름 카메라로 찍어서 한 장 한 장 인화를 해야 하니 여기저기 풍경에 필름을 낭비할 수 없었을 테고 그러다 보니 인물 위주의 인증숏이 대부분입니다. 제가 보고 느꼈던 버클리 캠퍼스 곳곳의 모습과 마리화나 냄새 가득하던 도시의 이모저모를 사진으로 남겼어야 하는데 아쉬움이 크네요. 자유 분방한 대학도시의 모습이 너무 멋져 보였고 피자 가게에서 먹었던 피자 한 조각이 얼굴보다 컸던 것이 어렴풋이 아직도 생각이 나네요.
5주간의 언어연수가 끝난 후에는 클래스메이트들과 사진도 찍고 fairwell party도 했었습니다. 기억 속에는 유럽에서 온 친구들이 많았던 것 같았는데 사진을 보니 우리 반에 중국친구들, 일본친구들이 많았네요. 인종별로 반을 나눈 것은 아닌가 합리적인 의심을 해 봅니다. 그러면서 20대에 푸릇푸릇하게 만났던 이 친구들이 지금은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지금 같았으면 SNS로 연결되어 연락도 계속하고 지냈겠지만 저때만 하더라도 펜팔 시대라 짧은 인연으로 끝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5주간의 언어연수를 마치고 서부 일주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라스베이거스로 가려면 꼭 지나가는 클라코 유령마을도 가고, 라스베이거스에 가서 슬롯머신으로 돈도 따보고, LA에서 디즈니랜드와 유니버설 스튜디오도 갔지요. 돌아오는 길에는 하와이에도 잠시 들렀습니다. 다른 곳은 그 이후에도 몇 차례 가 보았는데 하와이는 아직 그 이후 다시 가지 못하고 있네요. 조만간 하와이 여행을 한 번 계획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여행기를 정리하면서 오래된 여행을 다시 추억하며 쓴다는 것이 보람되고 의미 있는 작업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사람은 기억을 아카이빙하여 저장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 AI나 컴퓨터와 다른 점이라고 하는데 추억하고 싶은 순간들을 소환해 내면서 다시 한번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오묘함에 빠지기도 하고 앞으로 남은 동안의 삶에 어떤 새로운 것들을 어떻게 새겨 넣어야 할지 사색해 보는 기회가 되었어요. 여러분도 아주 예전에 했던 지금은 희미해진 여행의 자취를 내 안에서 꺼내어 실체로 만들어보는 경험을 해 보시길 감히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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