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아침 헬스는 단순히 체력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살아갈 힘을 준다. 힘을 쓰면서 힘을 받는 아이러니한 일이다. 평소에는 유튜브 예능만 보는 나이지만 뛸 때는 강연을 듣거나 알쓸신잡 같은 교양 영상을 보기도 한다. 자꾸만 생성되는 머신 위에서 움직이는 다리처럼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한국사, 큰별 최태성 선생님의 강연을 들었다. 매국노 이완용, 멈칫 망설이던 주제였지만 또 그만큼 흥미로웠다. 이제는 꽤나 시간이 지난 파묘라는 영화 제목이 썸네일에 함께 있는걸 보고는 톡톡 화면을 두드렸다. ‘이완용 무덤이 파묘 속 내용처럼 파묘되었다는걸까?’ 질문하기 무섭게 실제 이완용의 묘는 파묘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실제 우리가 사는 삶은 드라마나 영화보다 더 하다며 혼자 혀를 끌끌 차고 영상에 집중했다. 다리는 여전히 움직인채 말이다.
귀멸의 칼날을 보며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던 생각을 다시 고쳐먹었다. 사연이 있다고 해서 해코지를 하고 살면 안된다. 근거가 될 수는 있지만 정당화될 수는 없다. 이완용의 생애를 들으며 사람 존재에 대한 존엄과 사람으로서의 도리에 대해 왔다갔다에서도 조금 치우친 마음을 가졌다. 태어났다고 다 살아가는게 아니다. 먹고 자고 싼다고 사람이 아니다. 사람으로서 살아갈 도리가 분명 존재한다.
총명하다고 말하기 싫은 그 자체가 평가나 판단이라는 걸 알면서 들리는 혼잣말로 눈을 흘겼다. 세금으로 이루어지는 학교에 들어가 나라를 팔아먹을 미래를 만들던 행적이 기가 막혔다. 계속해서 고찰하는 교육의 의미가 더욱 중요해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교육하고 있는걸까, 우리의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보아야 한다는 말이 강연이 끝나고도 혀 끝에 맴돌았다. 텁텁한 쓴 맛을 느낀 것 같다. 나는 누구를 교육하고 있을까, 있는가. 어떤 교육을 이루고 있는가.
어떤 교육을 해야 할까. 나는 어떤 사람인가. 도리를 지키는 사람이 맞을까. 상념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내 발과 다리와 귀와 입, 손,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