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짓
무언가 할 일이 생기면 귀신 같이 안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생긴다. 이상하다. 희안하다. 1시간 뒤 마감이 정해져 있는 일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겠지만 2일이나 남았다면 딴짓에 몰입하게 된다. 특이하다. 말하고보니 1시간 뒤 마감이 정해져 있는 일이라면 일의 규모나 무게에 따라 다르겠지만 마감에 맞추어서 초인간적인 힘으로 1분 1초가 짧은 듯 빨려들어가 일할 가능성이 더 크다. 코앞으로 다가와야지만 슈루룩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이 주어지는걸까? 나는 딴짓하고 싶은 내 마음도 이해하고 딴짓을 하게 내버려둔다. 허용적인 편이랄까. 비록 지금 딱 할 일은 아니지만 눈을 돌려 집중한 시간이 딴짓하고 싶은 마음을 참고 죽어라 몰입하는 척 하는 순간보다 배움을 안겨준다. 가령 글을 쓰겠다 노트북을 켜놓고 한 글자도 쓰지 않은채 옆에 있는 휴대폰을 들고 쇼츠를 보기 시작했다면 곧이어 내려다보던 목이 아프기 시작할 것이고 목 아픔으로 인해 고개를 들며 '지금 할 일을 안하고 있는 내 상태'를 마주하게 한다. 또는 내가 해야 하는 다른 일을 인지시키고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다시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영영 딴짓의 세상으로 넘어가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럼 어쩔 수 없이 다음번에 다시 시도하는 수 밖에 없다. 언젠가의 나는 꼭 해야 할 일을 하게 될 것이니까. 결과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하게 되어서 좋다기 보다 조금 후회되기는 하지만 한 쪽 방향으로만 가는 기울임을 멈춰주는 딴짓이 나는 싫지 않다.
그런 딴짓의 또 딴짓을 해보겠다. ONE 그리고 OTHER의 ANOTHER 개념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나는 시골에서 태어났다. 앞에는 산이 있고 옆을 돌아보면 허허벌판에서 익어가는 식물들만 눈에 담긴다. 나의 할아버지는 농부셨다. 봄에는 바쁘게 세상 만물을 살리러 가고, 여름에는 염소를 데리고 다니며 풀을 매고, 가을에는 후두둑 떨어지는 열매를 똑똑 따러 다녔다. 겨울에는 심어놓은 채소가 얼어죽지 않을까 걱정하다 한해 농사를 추억하곤 했다. 할아버지가 끌어주는 리어카에 몸을 담고 나도 자연 속으로 나갔다. 할아버지가 논에서 일을 하시면 놀이하듯 옆에서 모를 물이 가득찬 논으로 쏘옥 심기도 했지만 옆에 앉아 "여기 꽃이 폈네?" 하고 태어남을 알아차리거나 부드러운 진흙을 만지며 땅에 그림도 그리고 내 손 파묻어 온감각을 손에 집중시켰다. 가끔 나도 할거라고 낫을 들고 벼를 베며 추수를 하다 내 손을 베어 아픔을 느끼는 날도 있었다. 길을 걷다 보이는 들꽃들의 생김새가 모두 다름에 감탄하며 내 맘대로 이름을 지어주고 집에 계신 할머니를 위한 들꽃 꽃다발도 만들어 드리곤 했다. 벌레라고 종종 불리는 곤충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덥석 덥석 잘 만지고 잘 "안녕" 인사하고, 찾아내어서 관찰하기 좋아하는 나는 숨어있는 돌을 들어올려 그 아래 사는 지렁이, 애벌레, 개미, 노린재 등을 만났다. 그들을 따라 가다보면 아무도 모르는 숨은 나만의 길을 만나기도 했다. 목이 마르면 위쪽 밭에 가서 가지를 따다가 한입 베어물었고 달달한게 당길 때면 토마토를 톡톡 따다 먹었다. 자연이 내 친구가 되는 나날이었다. 그 안에서 나는 거릴 것 없이 평화로웠다.
초등학생 때는 과학 시간을 좋아했다. 내가 자연에서 만났던 친구들이 교과서에 많이 나와 할 말이 많았다. 벼의 잎맥이 길쭉 길쭉 하다는 건 나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저 놀았던 순간들이 학습으로 다가와 알아가는 과정을 즐겁게 만들었다. 내가 감각으로 경험했고 경험하는 과정들이 내가 되어 나를 만들어갔다. 헤맨만큼 내 땅이었다. 반대로 신체적 감각, 경험하는 과정 없이 똑 하고 나와버리는 결과는 나의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아니었다. 헤매지 않으면 내 땅이 아니다.
세월은 흘러 흘러 컴퓨터라는 것이 나오고 이제는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생성의 시대가 열렸다. 질문 하나를 던지면 짠 하고 답이 나오는 마법의 주머니가 생겼다. 내가 발 벗고 찾아 나서서 무엇인지 들여다 보지 않아도 "이게 뭔지 말해줘" 라고 하면 "설명드리겠습니다" 하고 의미, 종류, 분포지 등등 온갖 정보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질문을 하나만 해도 여러 유형의 정보를 알려주니 더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어떤 말을 해도 어떻게든 대답해 준다. 직접 만지고 보고 듣는 과정 없이 산출되는 결과에 몸과 머리가 편해졌다. 하지만 편해진만큼 생각하는 인간 고유의 특성이 사라졌다. 사유의 과정 없이도 무엇인가 나오기 시작했다. 다른 생물과 다른 인간의 특성이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이라면, 이제는 인간의 생각을 대체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다시 질문이 시작되었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고민하는 사이에 인공지능은 정서라는 데이터도 배우고 인간의 대체가 되어 갔다. 아니 되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