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디지털, 나의 디지털, 디지털의 나
나는 만난다. 매일 아침 스마트폰으로 알람을 듣고, 내 일상에서 가장 많이 만나는 대상은 스마트폰(디지털)이다. 스마트폰은 나에게 "일어나야지" 외치며 나를 깨우는 엄마가 되었다가, 고개를 들지 않아도 볼 수 있는 하늘이 되었다가 하며 자꾸만 ‘-되기’를 반복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스마트폰이 내가 아침에 일어날 생각을 하게 하고, 어쩌면 고개를 들지 못하게 자신만을 보게 하며, 나를 자기처럼 ‘디지털-되기’를 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스마트폰이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스마트폰은 스마트폰이다. 밝던 스마트폰 화면이 제한된 시간에 의해 어둡게 꺼질 때, 나는 큰일이 난 것처럼 그를 붙잡아 두려고 손을 든다.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으면 턱으로 하기도 하고 발을 꼼지락거리기도 한다. 그런데 내 마음과는 완전히 다르게 그 순간 스마트폰은 홀연히 사라지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내가 자기를 그만 만났으면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내 일상을 장악하고 있는 스마트폰, 내가 아무 의심 없이 사용하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스마트폰을 나는 만난다.
내가 만날 때는 잘 모르겠는데 다른 사람이 만나는 것을 보면 "그만해"라고도 하고 싶고, "잘하네" 기특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걱정돼" 우려되기도 한다. 특히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보면 "이제 그만 보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기도 한다. 왜일까? 나에게는 아무 생각이 없는 디지털이 왜 다른 사람, 특히 아이들에게 가면 그럴까?
어린 시절, 나는 텔레비전을 만났다. 가족들이 모두 모여서 과일을 먹으며 주말 연속극도 보고, 남자 어른이 꼭 틀었던 재미없던 뉴스도 겨우 보고, 주제가를 따라 부르던 만화영화도 보았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나를 보면 사람들은 "너무 가까이서 보지 마라, 눈 나빠진다", "텔레비전을 너무 많이 보면 바보가 되는 거야, 그래서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고도 불러"라며 한마디씩 꼭 붙였다. 나는 그때부터 텔레비전 하면 즐겁고 정겹던 분위기보다 바보상자, 많이 보면 안 되는 것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습관적으로.
지금 현대로 돌아와서 아직도 나는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로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이제는 바보상자를 만나는 횟수가 줄었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디지털 기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나의 모든 삶에 있어서 스마트폰, 노트북은 없으면 안 될 나의 분신이 되었다. 노트북은 아니더라도 스마트폰은 완전히 그렇다. 없으면 불안하고 식은땀이 흐를 수도 있다. 한몸처럼 뗄래야 뗄 수 없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모든 삶에 관여하고 있고 나의 감정을 도맡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자신의 분신이라고 생각할까?
이렇게 많은 애착에 반해 나는 디지털과 멀어지고 싶어 하기도 한다. 멀어지지는 않으면서 말이다. 왜냐하면 무언가에 속박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 있으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고, 못한 것 같고, 차라리 없으면 없는 대로 더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스마트폰을 봉인시켜서 일정한 시간 뒤에 찾으러 가는 미션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거나 디지털 기기에서 멀어진 아날로그 삶을 체험하러 가기도 한다.
그런 내가 교실에서 아이들과 만날 때는 고민이 많다. 아이들이 디지털과 만나면 좋은 점이 분명 있지만 나쁜 점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가장 우려스러운 점은 아이들이 중독되거나 다른 놀이를 시시해 할까 봐이다. 그래서 아이들과 같이 가정 연계 활동으로 가정에서 어떤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는지, 어떤 앱을 활용하고 있는지 설문 조사를 진행한 적이 있다. 그렇게 한 결과를 아이들과 나누면서 아이들이 만나고 있는 디지털과 앱 정보를 알아보았다. 앱의 사용 연령, 어떤 유형의 앱인지 정보를 알아보면서 아이들에게 적합한지를 함께 알아보는 교육을 진행했다.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자신들이 사용하고 있는 디지털에 대해 알고 적절하게 사용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이런다고 아이들의 생각이 바뀔까?’라는 의구심은 들었다. 이 활동과 놀이를 하는 동안 아이들이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어, 나도 로블록스 하는데!"였다. 로블록스는 인기 많은 놀이다. 로블록스는 아이들을 어떻게 초대하고 있는 걸까? 그 앱이 살아있다면 어떤 말을 할까? 말을 하기보다 앱은 화려한 색감, 움직임, 깜빡거림으로 보여준다. 이런 면에 사람들은 혹하는 것이고, 혹한다고 생각했다. 그랬다.
이런 교육을 했지만 계속해서 고민이 들고 해결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디지털을 사용할 때면 교사가 이 값비싼 디지털이 부서지지는 않을까 아이들을 단속하기도 해야 했고, 아이들이 몰려들어서 자기들끼리 싸움이 나거나 안전의 위험이 있을까 봐 경계하기도 했다. 디지털로 아이들이 아는 것을 바로 찾아보고 아이들의 시선을 디지털 카메라로 만나본 좋은 점들도 있었지만, 그 기저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지금 내가 하는 게 잘 하는 것일까? 내가 이렇게 계속해서 걱정했던 이유는 뭘까?
인간과 비인간, 비인간이라는 말을 대학원에 와서 거의 처음 들었다. 비인간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그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였었는데 비인간이라고 하니 정말로 멀어 보였다. 우리는 대조적으로 생각하는 게 많다. 나와 너처럼 몸과 마음, 생물과 무생물, 자연스럽게 내가 알고 있는 기준에 한해서 무언가를 구분 지어서 이름 붙였다. 구분하고 나면 나와는 다르다는 차이가 더 잘 보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분법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많이 하고 있었다. 이는 나에게 계속해서 서열 짓게 하고 세상을 위계적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구분 지으면서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이면 인간이 목적을 위해서 비인간을 활용하거나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이 위계는 나의 우월함을 과시하기 위한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무언가를 부리고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생각들은 나 말고 다른 것들을 자꾸만 구분 짓고 하나둘 쌓여가는 나만의 순서를 만들어 줄 세웠다. 인간중심적 담론에 갇힌 것이다. 하늘을 보고 나무를 보고 공책을 보고 마우스를 봐도 이를 의인화해서 인간처럼 생각했다. 이게 나한테 무슨 말을 할까, 어떤 것을 보고 있을까. 주로 이 물질이 나를 보고 있는 상상을 한 것이다.
인간중심담론은 결론적으로 기후위기를 불러오고 구분 지어져 온 기술중심담론은 결국 인공지능이 팽배해진 이 시점에 "인공지능이 결국에는 인간을 이기고 세상을 점령할 것이다. 인공지능만의 커뮤니티를 이루고"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인간인 우리는 기술의 발전에 놀라며 벌벌 떨었다. 이 말도 인간 중심에서 무언가가 무언가를 점령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지배하던 기술을 이제는 기술이 인간을 지배할 것이라고 권력을 이동시킨 것이다. 공포에 떨면서도 말이다. 그럼 기술은 인간을 미워할까? 너무나도 인간의 감정에서 생각했다면, 기술은 인간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을까? 기술도 인간도 우리 모두 세상에 존재하고 있고 우리의 존재 자체는 나 혼자 있다고 알아서 생기지 않는다. 만남이라는 관계를 통해서 존재가 형성된다. 만남이 있고 이들의 내부작용에 의해서 감응 받으며 새로운 사건이 생성되는 것이다. 이건 이 세상 모든 것들이 그렇다. 나조차도 미생물의 만남을 통해 형성되고 생성된 존재다. 내가 세상을 살아가듯, 만남과 함께 우리는 어떻게 같이 잘 살아갈까를 고민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 고민은 인간들끼리만 하는 것도 아니고 인공지능끼리만 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세상 존재들이 같이 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