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부터 9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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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샘

9시부터 11시반까지

_나는 왜 채윤이의 흥얼거림을 샤프로 썼는가

나도 좋아하는 노래다. 아무 이유 없이 좋은 친구. 나도 현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들으며 그 영상도 보고 노래도 들었었다. 내가 경험했던 아이들은 아무 이유 없이 좋은 친구 영상을 재미있게 보며 달리는 행동에 깔깔 웃기도 하고 어떤 이야기가 전개되는지 자기들끼리 이야기도 지었었다. 회상해 보니 나는 아이들에게 저 노래를 들려줄 때 꼭 영상을 보여주었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이 국악 동요를 듣고 싶고 아이들에게 소개하고 싶고 다같이 따라부르고 싶어서 배경화면으로 계속 틀어두었었다. 영상에 나오는 캐릭터의 모습을 아이들이 너무 웃기다고 생각하며 과도하게 지어내거나 저 영상을 보고 따라한다고 일어나서 흥분하며 행동하면 영상을 내리기도 했다. 그랬던 노래를 연구자로 해님반 교실에 온 첫 날 듣게 된 것이다. 나에게도 너무나 반가운 노래였는데 해님반 아이들에게도 그런 듯 했다. 새로운 사람인 나를 보고 아무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자신들의 아침 할 일인 한꺼풀만 하던 아이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오늘 어디서 해야해?” 한꺼풀 몇 쪽 하는지 간단하게 2마디 나누고 자기 그림 그리던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이 나에게 관심이 없는 이유가 낯을 가려서 그런걸까, 정말로 새로운 어른에게 관심이 없는걸까, 아니면 숨기고 있는걸까 나의 머릿 속에서만 온갖 의문이 돌아다녔다. 말로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그럴 때였다. 그렇게 책상에 옹기종기 우리 4명이 모여 앉아 있을 때, 화면은 검정 바탕으로 보이지 않지만 적막한 교실을 뚫고 띠리리리리리 노래가 나오기 시작한거다. 마음 속으로 아주 작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아래쪽으로 시선을 내리고 그림만 보던 채윤이가 “아무 이유 없이 좋은 친구~ 아무 이유 없이 좋은 친구”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내적 반가움이 더욱 수면 위로 철썩 하고 치밀어 올랐지만 아이들이 반응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나댈 수 없었다. 나는 조심스러운 존재인 것. 그저 채윤이의 흥얼거림 그 속으로 나도 풍덩 들어가 노래를 즐기는 채윤이를 만나고 마음 속에서만 노래 부르는 나를 만났다. 곧 재원이도 노래를 불렀고 두 친구가 “나 이 노래 좋아” 서로를 쳐다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도 좋아’ 마음 속 한 마디가 참지 못하고 나와버렸다. ”나도 좋아“ 내 공감을 들은건지, 한쪽 귀로 흘러가는 말로 치부해 버렸는지 그림만 그리며 아이들의 흥얼거림만 책상 위에 간지러이 남았다.


15시부터 18시까지

_반갑다 라투르, 제발 처음 뵙겠습니다라고 말하지 말아줘, 제발

agency 행위주체성, 행위능력, 행위성 이라는 글자만 놔두고 보면 스스로에게서 발현되는 주도성과 비슷한 개념으로 읽힌다. 나중에 교수님께서 그 개념을 우리 대부분이 지금 따르고 있는 근대의 교육관에서는 의식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주체성으로 이해하고 의식에서 경험하지 않아도 추론하는 능력을 이성이라고 한다고 이야기해 주시며, 내가 그린 개념이 라투르의 이론에서 나오는 행위주체성과는 다르다고 하셨다. 어쨌든 나는 agency를 보았을 때 굉장히 개인적인, 개인에 의해 형성되는 힘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학자를 만나고 내 삶에서의 배움을 떠올렸을 때 라투르는 행위주체성을 강조하면서 네트워크 형성이론을 중심으로 관계를 강조하고 우리는 나를 알고 내 스스로 할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동체에서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을 뼈 속 깊이 심어왔다. OECD teaching compass(티칭 나침반) 에서도 교사에게 강조하는 것이 혼자서 모든 문제를 안고 해결하는 능력이 아니라 다른 동료와 함께 헤쳐나가는 걸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처럼 존재에 앞선 만남과 관계라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매우 매우 중요하게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것이다. 함께함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끼며 이 자리에서 같이 나눌 수 있음에 다시 한 번 감사했다. 그리고 디지털에게 행위주체성이 있다고 바라보면서 전쟁 중에 사람들을 사살하는데 사용된 인공지능을 떠올렸다. 내가 유아와 디지털 간의 사이 내부를 들여다 보기 위해 그 둘의 행위주체성을 기술하고자 하지만, 이렇게 행위주체성을 발휘하는 인공지능은 너무나도 위험하다. 인간중심의 사고를 벗어나야 하는데 일단 내가 죽을 수 있고 우리를 죽일 수 있는 인공지능의 주체성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가 심각해졌다. 논문에서는 라투르의 주장도 어디까지 수용하고 어디서부터는 수용할 수 없는지 가능성과 한계를 비판해야 한다고 나와있는데, 이처럼 마냥 행위주체성을 보면서 내부-작용을를 들여다보는게 긍정적이지만은 않게 다가올 수 있다는 새로운 고민이 피어올랐다. 그렇다면 포기해야 하는가? 그것도 아니다. ‘공존’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걸까, 위험한데로도 갈 수 있다는 걸 인정하고 모든 것을 균형적이고 중립적인 관점으로 바라봐야 하는 걸까. 이건 시선을 돌려서 바라본 하나의 관점일 뿐이라는 지난 학기 음성이 뒤를 때린다. 응, 나는 우선은 신유물론적으로 바라보겠다.


19시부터 21시까지

_노마디즘2 유목의 철학, 전쟁기계의 정치학

어렵다. 전쟁 기계라는 용어를 왜 써야 했을까. 부정적인 감정이 글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확 다가온다. 동시에 방금 이 생각마저도 너무 국가적이라고 나를 냉소한다. 국가적, 전쟁기계와 반대되는 국가적임. 전쟁기계가 자유롭게 사고하고 창발하는 노마드 라면 국가적은 고정적이다. 홈 파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으로도 말할 수 있는데 굳이 비교하는 이분법을 사용하자면 국가적인 방식은 홈이 패여 있는 공간이고 전쟁 기계는 자유롭게 미끄러질 수 있는 공간이다. 너무 세게 홈이 파인거 아냐? 혼자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묻다가 ”아니! 홈이 파여봐야 홈이 파였다는 것도 알고 얼마나 파였는지도 알 수 있는거고, 매끄러운 곳에서 미끄러져 봐야 이게 얼마나 아플 수도 있는지 알 수 있는거 아니냐고“ 빼액 소리를 지른다. 그러다 교사로서 너무나도 홈 속에 갇힌 채로 아이들을 만난 건 아닌지 나를 본다. 나는 교사로서 아이들의 자유로운 사고가 어떻게 창발할 수 있게 도울 수 있나! 문득 나도 학생임을 알아차린다. 나를 지도해 주시는 교수님은 이렇게 국가적이고 홈이 여러군데 패인 나를 어떤 존재가 될 수 있게 돕고 싶으실까? 아이들처럼 자유롭고 창발할 틈이 없어 죄송한 사과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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