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 전 금요일에 퇴근하고 집에 도착하니 불이 다 꺼져 있었다. 평소 같으면 ’엄마‘하고 달려왔을 딸아이는 인기척도 없었다. 현관에 놓인 신발을 보니 집에 있는 게 분명한데, 의아한 일이었다. 딸아이는 힘없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목이 부어 힘들다고 했다. 열이 제법 높았다. 해열제를 먹이고 물수건을 이마에 올리며 한참 상태를 살폈더니 다행히 열은 차츰 내렸다. 엄마한테 왜 연락을 안 했는지 궁금했다. “누워 있으면 괜찮을 줄 알았어.”
이마에 물수건을 교체해 주면서도 내일 출근할 생각부터 스쳤다. 아이가 아플 때는 곁에서 보살피고 싶지만, 임원과의 미팅이 잡혀 있어 빠질 수가 없었다.
토요일 아침, 남편에게 딸을 부탁하고 회사에 도착했다. 나는 트랜스포머라도 된 양 업무 모드로 변신했다.
9시 30분부터 5시간 동안 팀장들과 함께 내년도 사업계획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마라톤 회의로 어느 정도 가시적인 결과물이 나오자, 임원은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평일에는 분주하여 진득하게 토론할 시간을 확보할 수 없는데, 토요일에 진행하니 그 효과는 분명히 있었다. 평소 퇴근 후에 아이들 저녁 챙기느라 종종걸음으로 급히 가는데, 토요일 퇴근길 여유가 있어 그런지 월초에 다녀온 가족여행도 떠올랐다.
괌에 다녀온 지 3주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꽤 오래전에 다녀온 것 같다. 3박 4일간 여행 이후 일상에서 많은 일이 있었다는 방증이다. 괌에서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 실컷 보고 맛난 음식 먹고, 아이들과 웃고 떠드니 편안했다. 바다에 나가 낚시도 하고 돌고래와 거북이를 만나고 스노클링도 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여행은 추억을 남기고 언제든 이야기 보따리를 풀 수 있으니 가성비 측면에서 최고다.
해외여행을 갈 때마다 병원에서 연락이 올까 봐 신경이 쓰인다. 친정 아빠는 수년째 병원에 입원해 계신다. 병원비, 추가 검사 등 병원과의 소통은 내가 맡아서 한다.
시어머님이 김치와 고구마를 보내주셨다. 감사 인사를 빼먹으면 절대 안 된다. 나와 남편 중에 누구라도 전화를 드리면 문제가 없는데, 서로가 했겠거니 하고 넘겼다가 몇 차례 쓴소리를 들었다.
둘째 시누이가 친구들 모임 후에 우리 집을 찾았다. 몇 주 전에 잡힌 일정인데도 청소를 차일피일 미루다 당일 부리나케 치웠다. 시누이 온다고 대청소했으니 좋게 생각하면 좋은 거다. 평소에도 나를 많이 이해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친언니는 아니니 건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11월 14일, 친구 3명의 자녀가 수능시험을 치렀다. 응원과 격려를 담아 선물을 보냈다. 바쁜 와중에 인사를 까먹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회사에서 11월 초에 일부 팀장을 선별하여 강남의 한 복판에서 장사 체험 기회를 줬다.
나는 푸드트럭에서 닭꼬치를 팔았다.
7개 조에서 다른 품목으로 장사를 했다. 푸드트럭마다 사장님이 상주하며 조원을 지도하셨다. 딱 이틀만 진행되는 미션이었는데 판매액과 판매 건수, 마케팅 전략, 판매 전략 등을 토대로 정량평가와 정성평가의 합계로 순위가 정해졌다. 이틀간의 장사 경험은 그야말로 값졌다.
닭꼬치의 품질과 맛은 일품이었기에 자신 있게 강남지역에서 일하는 지인들에게 연락했다. 돌판에서 닭꼬치를 굽는 영상을 찍어 보냈더니 응원 차 직접 찾아와 먹고 직장동료들을 위해 포장도 해 갔다. 푸드트럭은 줄 서 있는 모습과 서서 먹는 사람들 자체가 살아있는 마케팅이다. 외국인도 많이 오셨는데 영어로 소통할 수 있어서 동료 팀장들의 칭찬을 한 몸에 받았다. 닭꼬치는 저녁 장사가 피크였다. 이틀 내내 오는 고객도 있었고, 하루에 두 번 오는 고객도 있었다.
11월 중순에는 새벽에 20분간 줌(Zoom)으로 번아웃(Burnout)을 주제로 강의했다. 매달 2회 발표하다 보니 실력이 느는 장점도 있지만 매번 강의자료를 늦게 만드는 습관 때문에 강의 하루 이틀 전에는 마음이 묵직하다.
매주 수요일 새벽과 목요일 저녁에는 비대면 독서토론회가 있다. 책 한 권을 정해, 여러 회차에 나눠 진행하므로 한 회 읽을 책 분량이 많지 않아 부담 없을 것 같아서 신청했는데, 때로는 책을 다 읽지 못하고 참석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내가 계속 독서모임에 참여하는 이유는 이렇게라도 ‘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어 놓아야 몇 줄이라도 더 읽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만 보면 열심히 사는 한 개인의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
보이는 모습은 좋을지 몰라도 최근 2주간 나는 무척 힘이 들었다. 마감 시간에 쫓기듯 사느라 마음이 부대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올해 내내 쫓기듯 살다가 또 괜찮았다가를 반복했다. 1인 7역을 하니 신경 쓸 사항이 많고 예상치 못한 일들도 생겨도 그러려니 넘겼다. 그런데 오늘 아침 깨우쳤다. 마감 시간에 쫓기듯 사는 건 오롯이 나의 P 성향 때문인 것을.
미국의 유명한 과학 월간지 Scientific American은 MBTI가 ‘존재하는 최악의 성격 테스트 중 하나’라고 말하고, MBTI를 비판하는 일부 의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MBTI는 알기 쉽고 짧고 명확하고 재밌는 성격유형이어서, 널리 활용된다.
MBTI는 두 개의 태도 지표(외향-내향, 판단-인식)와 두 개의 기능 지표(감각-직관, 사고-감정)에 대한 개인의 선호도를 밝혀서 4개의 선호 문자로 개인의 성격유형을 알려준다.
누구나 8가지 특성을 조금씩 다 가지고 있다. MBTI는 개인이 대체로 어떤 경향을 보이는지 분류하는 데 유용하다.
나의 시선을 유독 끄는 태도 지표는 판단(J)과 인식(P)이다. 선호하는 삶의 패턴에 따라 판단(Judging)과 인식(Perceiving)으로 구분되는데J는 계획적이고 체계적이며 기한을 지킨다. 그에 반해 P는 자율적이고 상황에 따라 적응하며 최대한 많은 정보를 ‘인식’할 때까지 결정을 보류한다.
‘나는 P의 성향이 더 강하다’라고 말하면 팀원들과 후배들이 의아해한다. 그들이 보기에는 내가 J 같다고 한다. 2년 전 MBTI 강사가 말하길 J는 미리 세워둔 계획이 틀어지면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지만, P는 계획을 세우지도 않을뿐더러, 계획이 틀어져도 바뀐 상황에서 다른 대안을 찾기 때문에 J보다는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고 했다.
J와 P 중 어느 유형이 더 좋다고 할 수 없지만 J의 ‘계획성’이 난 그저 부럽다.
P 유형은 최대한 많은 정보를 ‘인식’할 때까지 결정을 보류한다. PPT 발표가 있으면 머릿속으로 ‘아이디어’라는 구슬을 많이 모으지만 정작 구슬을 꿰기 시작하는 것은 발표하기 하루나 이틀 전이다. 몰아치기와 벼락치기를 할 때마다 괴롭다. 미리 준비하지 않는 나 자신을 책망해 보지만 고질병처럼 고쳐지지 않는다. ‘다음부터는 미리 준비해야지’ 다짐하고 다짐해도 그때뿐이다. 하루 이틀 만에 완성도 높은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해야 하니 돌아버릴 지경이다. 그런데도 자신을 다독이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자’라는 태도로 열과 성을 다한다. 완결성에 대한 욕구는 강하기 때문에 엄청난 밀도감으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수정하고 보강할 부분은 추가한다. ‘어떻게든 해낸다.’ 정신을 발휘하여 어느 정도 만족스럽게 발표하고 나면 긴장이 풀린다. 짧은 시간에 에너지를 과도하게 사용하다 보니 쉽게 지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된다.
최재천 교수의 <공부>라는 책에서 ‘기한보다 5일 먼저 제출하는 것에 대한 장점’에 관한 글을 읽으며 감명받아 항상 촉박하게 하는 나의 습관을 고치고자 노력했지만, 시도할 때마다 작심삼일이었다. 일에 있어서는 계획적으로 하는데, 내 개인적인 일에 있어서는 적용이 안 된다.
경영 마케팅 독서 모임에 한 달에 한 번꼴로 참여 중이다. 토론회 전 주의 일요일 자정까지 독후감을 제출해야지만 모임에 참석할 수 있다. 책을 읽으며 줄도 긋고 ‘이 부분을 토론 주제로 발제해야지’라며 책 페이지도 접어놓지만, 독후감 작성을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기한을 넘기기 일쑤였다.
매번 빚쟁이에게 쫓기듯 살지만 잘 고쳐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오늘 아침에 깨우쳤다. 우선순위(?)를 빈번하게 바꾸는 나의 성향 때문이다. 어제 <김미경의 딥마인드> 도서가 도착했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책을 보니 독후감 쓰는 것보다는 그 책부터 읽고 싶어져 책을 펼치면서 깨달았다.
'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먼저 해서 매번 기한에 허덕이는구나‘
나는 ‘현재의 욕구’를 따르는 편이다. 학창 시절에는 그나마 스스로 통제가 되었다. 내일이 수학 시험이면 오늘 소설책이 읽고 싶더라도 참았지만, 요즘의 나는, 즉각적인 욕구에 충실한 편이다. 오늘 아침에 깨우치지 못했다면, 나는 읽고 싶은 책을 읽었을 것이고 독후감은 또 뒷순위로 밀리게 되니 오늘 밤 괴로움의 한가운데 있을 것이다. 독후감을 먼저 작성하고 이후에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면 될 일이다. 순서만 바꾸면 쫓기듯 살지 않고 여유 있게 지낼 수 있다. 별것 아닌 것 같겠지만, 천만에! 나에게는 그야말로 ‘유레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