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이 쓴 단편소설 <큰 바위 얼굴>은 어니스트라는 소년이 평생을 걸쳐 찾으려 한 누군가의 이야기다.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어니스트는 집 앞의 바위산을 자주 바라보았는데, 놀랍게도 그 바위산은 사람의 얼굴처럼 생겼다.
“큰 바위 얼굴의 눈빛은 무척 친절하게 자애로워요. 저는 저 큰 바위 얼굴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꼭 만나고 싶어요. 저 큰 바위 얼굴처럼 생긴 사람이라면 분명 친절하고 사랑이 넘칠 거예요.”
소년은 늘 어머니를 향해 말하곤 했다.
사업가, 장군, 시인 등을 만나 봤지만 그들은 큰 바위 얼굴과 닮지 않았다. 그러다 사랑과 선한 지혜를 실천하며 살고 있는 어니스트가 큰 바위 얼굴을 가장 많이 닮은 것으로 책은 결론을 맺는다.
나를 찾아와 고민을 이야기하는 친구와 동료가 꽤 있다. 그들이 내게 이야기하면 열심히 경청하다가 앞뒤가 이해되지 않을 때 자연스레 질문을 던진다.
“이럴 때 이렇다는 거지?”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했다는 거지?”
그들이 두서없이 이야기할 때면 한두 줄로 요약하며 사연을 빨리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며 객관적으로 말을 하려 애쓰는 편이다. 상황에 따라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다는 여지도 슬며시 남겨 놓는다. 동기부여든 위로든 공감이든, 그들이 고민을 털어놓기 전보다는 긍정의 마음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내가 고민으로 허우적댈 때, 나는 나처럼 상담해 줄, 보안도 확실히 지켜지고 판단하려 하지 않는 사람을 찾으려 노력했다. 나에게 잘못했다고 뭐라 하지 않으면서, 누구나 그런 상황이면 힘들 수 있다며 공감해 주고,나의 장점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충분히 다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는, 그 정도면 아주 잘하고 있다고 격려해 줄 그런 사람 말이다.
물론 내 주변에는 친구도 있고 코치도 있다. 하지만 나와 나의 상황, 나를 둘러싼 지인들까지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내가 나를 상담하는 셀프 상담이 최선이지만, 사실 실행하기는 쉽지 않다. 나와의 상담은 늘 급한 일에 밀리기 일쑤다. 며칠간 고민만 이고 지고 짐짝이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감칭반’을 시작했다. 어제 하루를 돌아보며 감사, 칭찬, 반성을 하는 것이다. 감사 일기의 장점은 많이 알지만, 몇 년째 쓰다 말다 하기를 반복했다. 최근 3주간 매일 아침 전날에 있었던 일에 대한 감사, 칭찬, 반성을 했더니 내 인생의 질서가 좀 잡히는 느낌이다. 감칭반중에 칭찬의 효과가 제일 크다. 나이 들면서 나를 칭찬해 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데 매일 아침 내가 나를 칭찬해 주니 기분이 상당히 좋다. 부서장으로서 직원들에게 칭찬을 많이 해주는데 정작 나는 팀원들에게 칭찬을 자주 듣지 못한다. ‘팀원이 팀장님을 어떻게 칭찬해요?’라고 하지만 칭찬은 나이 불문 지위 불문 상황 불문이다. 좋은 점이 보이면 칭찬하면 된다. 전날에 대한 반성을 통해서 나는 좀 더 성숙해진다. 개선을 위해 반성하며 내면의 나와 진지한 대화를 이어간다.
감사보다는 비교가 익숙했다
많은 부모는 자식이 공부 잘하기를 바란다. 공부 열심히 해서 명문 대학에 가면 그 이후 직업 선택의 폭이 넓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부모가 자녀를 평생 돌봐줄 수 없기에, 스스로 자립하고 세상을 살아가려면 어느 정도 경쟁 우위가 있어야 한다. 공부가 어찌 보면 가장 빠른 방법이다. (‘공부가 인생의 다가 아니다’ 라는 원론적이고 맞는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자) 페이커처럼 게임을 좋아하고 잘한다면 게임 분야로 진로를 선택하는 것이 합당하다. 하지만 페이커와 같은 프로게이머가 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스카이캐슬 같은 대학입시를 다루는 드라마를 보면 자식을 과시 대상으로 여기는 부모를 비꼬기도 하지만 ‘자식을 잘 키워서 좋은 대학에 보냈네’ ‘직장 생활하면서 자녀도 잘 키웠네’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 보통 부모의 솔직한 바람이다.
아들이 초등학교 입학했을 때 나는 회사에서 맡은 일이 많았다. 승진하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일했고 성과도 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굳이 그렇게까지 회사 일에 목매달고 사람들과 좋게 지내려 애쓸 필요가 있었나?’ 싶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회사 일에 지쳐 파김치가 되진 않았을 거다. 집에 오면 씻고 잠들기에 바빴다. 다시 돌아간다면 ‘일과 가정의 균형’ 뭐 이렇게 거창한 단어로 포장하지 않더라도, 아이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에너지를 잘 비축해서 퇴근할 것이다.
비교의 마음이 들면 과거에 했던 나의 선택들은 대부분 후회로 다가온다. 하지만 셀프 상담을 통해 돌아보면 그때는 최선이었다. 과거의 나는 지금만큼 현명하거나 경험이 많지 않았기에 오늘의 시각과 사고를 기준으로 과거의 행동과 의사결정을 되짚어 보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
감칭반을 하면서 비교가 줄었다. 공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숙제 열심히 하고 안 하고를 떠나 있는 그대로 자녀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존재 자체로 감사함을 느낀다.
일요일 오전에는 교회에 갔다. 나는 본당 예배에, 아들은 중등부 예배에 참여했다.
오늘 설교 말씀의 주제는 ‘감사함으로 나아가자’ 였다. ‘감사는 또 다른 감사를 부르는 마중물이다. 감사는 결과가 아니고 원인이다.’라는 말씀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가족 모두 건강하고 아들과 딸이 씩씩하게 잘 크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함은 차고 넘쳤다.
퇴근하면서 어디로 가야 할지 결정을 못 내렸다. 다음날 골프 라운딩을 대비하여 연습장에 갈지, 아니면 아이들과 맛있는 저녁을 먹을지 사이에서 고민했다. 마음으로는 아이들, 머리로는 골프장이었다.
골프 친 지 10년이 넘었다. 올해는 비거리도 늘어서 골프 스코어도 잘 나왔다. 골프는 하루 연습 안 하면 본인이 알고 일주일 안 하면 주변 사람들이 다 안다고 할 만큼 꾸준한 연습이 필요한 스포츠이다. 나는 최근 몇 달간 필드는 고사하고 연습장도 다니지 못했다. 이렇게 공백이 긴 상태에서 라운딩을 가면 아이언이 생크 나거나 뒷땅 미스샷이 나올 확률이 높아진다.
결국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연습장에 갔던 나를 칭찬한다. 감칭반을 하면서 그냥 지나칠 일상도 ‘칭찬’의 꺼리가 되었고 스스로 칭찬해 준 덕분에 긍정의 호르몬이 내 몸속에 유유히 흐르는 것 같다.
3주밖에 안 했는데도 여러 변화가 나타났다. 일단 시간의 여유가 생겼다. 두더지 게임하듯이 해야 할 일들을 쳐내느라 동분서주했는데 내가 달성할 목표에 영향이 적은 활동부터 줄였다. 필사하면 좋지만 지금 당장 내게 우선순위가 아니어서 온라인 필사 모임을 접었다. 저녁 모임도 업무 관련이 아니면 참석하지 않았다. 꼭 가야 한다면 1차에만 참석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은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비교의 마음도 줄었다. 엄친아와 나의 아들을 비교하지 않는다. 서글서글하고 자기 의견을 논리적으로 말하고, 유머 감각이 있고 따뜻한 심성을 가진 내 아들의 특징과 장점이 마음을 바꾸니 더 크게 다가왔다.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보다 나와의 대화가 더 재밌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매일 감사, 칭찬, 반성을 하면서 민낯의 나와 마주하게 되었다. 감사할 일은 평소에도 많았다.다만 내가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나이 들어 칭찬받을 기회가 없었는데 이제 나는 매일 매일 칭찬받는다. 하루의 반성할 점을 내 마음과 이야기 나누다 보면, 자책보다는 공감과 격려로 채워지고 동기부여 받는다. 사람들은 내가 예전보다 여유 있어 보이고 표정도 밝아졌다 말한다.
<큰 바위 얼굴>에서 어니스트는 어머니에게 ‘저 큰 바위 얼굴처럼 생긴 사람이라면 분명 친절하고 사랑이 넘칠 거예요.’라고 말했는데, 감칭반을 하면서 내가 더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나에게 친절하고 나를 사랑함으로써 타인에 대해서도 좀 더 관대해졌다.
초등학교 때 읽었던 <큰 바위 얼굴>의 주인공, 나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Key Message
1. 막연히 ‘하면 좋겠지’라는 생각에 벌린 일들을 가만히 보세요. 본인의 목표와 연관이 적은 활동을 골라서 빼내세요.신발장 크기는 그대로인데 신발만 계속 사들이면 놓을 공간이 없잖아요.
신어서 불편한 신발은 신발장에서 꺼내 버리세요.
2. 자신에게 친절할 수 있는 사람이 타인에게도 친절할 수 있어요. 친절하려면 시간 여유와 마음 여유가 있어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