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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하지 않을 용기

행동은 불안을 줄이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처방이다.

by 하랑

‘그 업무’를 떠안고 싶지 않았다. 내가 맡아줬으면 하는 상사의 신호가 있었음에도 나는 모르는 척했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일이 내 손에 들어올 것 같으면서도,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미묘한 경계선 위에 있었다. 결국 상사의 은근한 압박이 이어졌고, 마지못해 일을 수락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을 맡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마음속의 돌덩이가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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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팀원들을 불러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회의를 진행하며 향후 업무추진에 있어 나에게 기대하는 사항을 말해보라고 하니, 모두 기다렸다는 듯이 요청 사항을 읊기 시작했고 활발한 대화가 오고 갔으며 회의는 생산적으로 마무리되었다.


회피를 해왔던 이유는 그레이존 영역의 일이었고, 이해관계자가 많은 상황이라 시간과 에너지 소모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4개의 유관부서와 각각 회의 일정을 잡기 시작하니 ‘그래, 하면 되지 뭐!’라는 기분좋은 자신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해야 할 일은 늘었는데 마음은 오히려 평안했다. 퇴근길마다 마음속에서 들리던 “언제까지 피할래?”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


만약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모른척하며 회피했다면, 오늘 밤은 분명히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몸은 쉬었겠지만, 머릿속은 온통 그 일 생각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스트레스란 어쩌면 ‘아직 시작하지 않은 일’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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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행동 활성화(Behavioral Activation)’라고 부른다. 우울함이나 불안을 느낄 때 사람은 회피 행동을 택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작게라도 행동을 시작할 때 불안이 감소한다. 하버드 의대 연구진(Leahy, 2018)은 “문제를 회피하는 사람일수록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가 장기간 높게 유지되며, 직면 행동을 취한 사람은 초기엔 스트레스가 급등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급격히 줄어든다”고 발표했다. 즉, 두려움을 피하면 편안함은 잠시지만 불안은 지속되고, 반대로 직면하면 일시적으로 불안이 높지만 곧 안정을 찾는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을 수없이 해왔다. 미루던 보고서를 마감 하루 전에 몰아 쓸 때의 불안감, 상대부서가 난색을 표명할 것이 예상되면서도 용기 내어 전화 할 때의 긴장감을 잘 안다. 하지만 막상 행동에 옮기면 그동안 나를 짓누르던 불안이 어느새 사라진다. 행동이 불안을 몰아내는 것이다.


Journal of Behavioral Therapy and Experimental Psychiatry(2016)에 실린 논문에서도 “문제를 인지하고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세운 순간, 인간의 뇌는 ‘통제감(sense of control)’을 되찾는다”고 보고했다. 통제감이란 ‘내가 상황을 주도하고 있다’는 감각이다. 문제를 회피하면 우리는 끌려다니는 존재가 되지만, 행동을 시작하는 순간 그 중심축을 되찾는다.


“걱정은 행동으로 옮기는 순간 절반으로 줄어든다.”

걱정은 생각 속에서만 커진다. 머릿속에서 계속 돌리면 점점 더 커지고 무겁게 느껴지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순간 ‘현실의 문제’로 바뀐다. 현실의 문제는 생각보다 작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행동은 불안을 현실로 끌어내려 구체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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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는 회피에서 오고, 평안은 직면하면 온다.’ 몸이 피곤해도 마음이 가벼운 날이 있고, 몸은 쉬었는데 마음이 더 무거운 날이 있다. 그 차이는 결국 ‘행동’에 있다. 회피는 겉으로는 휴식처럼 보이지만, 실은 마음을 잠식하는 독이다. 반면 행동은 힘들지만, 끝내 나를 자유롭게 한다. 오늘 내가 느낀 평온이 그 증거였다. 일을 맡고, 방향을 잡고, 사람을 모으고, 회의를 잡는 일련의 과정에서 나는 다시 ‘주도권’을 되찾았다. 피할 땐 상사가 나를 압박했지만, 행동하자 상사의 평온도 나에게 전달되었다.

스트레스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무게가 달라질 뿐이다. 문제를 피할수록 무게는 커지고, 직면할수록 가벼워진다. 인생의 많은 불안은 ‘하지 않은 일’에서 온다. 시작하면 그 불안의 절반은 이미 사라진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우니 몸은 고단했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그 편안함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을 때 느끼는 게 아니라, 두려움을 넘어선 뒤에야 얻을 수 있는 선물이다. 인생의 문제도 결국은 마주해야 비로소 가벼워진다. 문제를 피할수록 마음의 짐은 쌓이고, 직면할수록 마음의 공간은 넓어진다. 행동은 불안을 줄이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처방이다. 마음의 평안은 ‘피하지 않을 용기’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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