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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어냄으로 단단해지는 법

비워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by 하랑

10월은 의지 하나로 버텨낸 달이었다. 체력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유난히 길고 버거웠다. 추석 연휴 7일 중 이틀은 시댁에 다녀오고, 나머지 5일 동안은 집을 대청소했다. 100권이 넘는 도서와 100벌이 넘는 옷을 정리해 기부했다. 쌓였던 물건이 빠져나가자 공간은 환해졌지만, 마음의 피로는 여전했다. 10월 한 달간 골프 라운딩만 7번이었다. 3일 연속 라운드를 돌던 날에는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실감 났다. 그렇게 좋아하던 골프가 어느새 의무처럼 느껴졌고, 퇴직을 고민하는 직원들과의 면담, 4분기 전략회의, 내년도 사업계획 워크숍, 중학생 아들의 중간고사까지 겹치며 하루하루가 숨 가쁘게 흘러갔다. 몸도 마음도 한계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그런데 정작 나를 가장 지치게 한 것은 일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지?’ 하는 회의감이 점점 커져갔다. 골프 약속을 그렇게 많이 잡은 것도 의도한 일이 아니었다. 몇 달 전부터 정해진 약속은 네 개뿐이었는데, 업무 관련 일정이 갑자기 끼어들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라운드가 끝난 뒤 교통체증에 갇혀 차 안에서 몇 시간을 허비할 때면 ‘이후 약속이 모두 취소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정체된 도로 위의 답답함은, 내 삶 전체가 멈춰버린 듯한 느낌을 주었다.


회사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퇴직자와의 면담은 늘 감정이 소모된다. 남기로 한 사람을 다독이는 일도 만만치 않다. 워크숍 자리에서 내년도 사업계획을 논의하다 보면 세상은 점점 더 빠르게 돌아가는데도, 내 마음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걸 실감한다. ‘성과’라는 단어가 부담스럽게 느껴지고, ‘계획’이라는 말에조차 숨이 막혔다. 한때는 바쁘게 사는 것이 곧 성장의 증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번 달, 나는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착각이었는지를 절감했다.


몸과 마음이 동시에 피로해지면 사람은 본질을 잊는다. 나는 ‘해야 하는 일’에만 몰두한 채 ‘왜 하는가’를 묻지 않았다.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습관이 일상이 되어버렸고, 밤늦게 집에 돌아와도 뿌듯함보다 공허함이 남았다. 성과보다 생존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퇴직자가 떠나고 사무실 분위기가 안정되면서 나도 잠시 숨을 고를 틈이 생겼다. 저녁 약속을 잡지 않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아이들과 도란도란 대화하고, 소담한 저녁을 함께 먹는 그 시간이 얼마나 큰 회복이 되는지 새삼 깨달았다. 결국 내게 필요한 건 ‘더 많은 일정’이 아니라 ‘덜어내는 용기’였다. 더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믿음이 나를 구했다.



“지혜로운 인생은 무엇을 더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덜어내는가에 달려 있다.” 철학자 세네카(Seneca)의 말처럼, 나의 삶은 ‘덧셈’보다 ‘뺄셈’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몸에 좋은 음식을 찾아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몸에 해로운 음식을 줄이는 것이 건강에 더 유익하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할 일을 늘리는 대신,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덜어내는 것. 그게 진짜 성숙한 선택이다.


하버드대 심리학자 매튜 킬링스워스(Matthew Killingsworth)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불행하다고 느끼는 순간의 47%는 현재에 집중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그는 ‘마음이 떠다니는 상태(mind-wandering)’가 행복을 떨어뜨린다고 말했다. 지나치게 많은 일정 속에서 내가 불행했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늘 다음 약속, 다음 과제, 다음 목표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가느라 현재의 나를 돌보지 않았다. 결국, 그가 말한 행복의 본질은 일정의 양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이었다. 세네카가 말한 뺄셈의 철학은 킬링스워스가 말한 ‘현재 집중’과 닮아 있다. 덜어내야 지금, 이 순간이 비로소 보인다.


어느 날 회사 로비에서 환하게 웃는 동료를 봤다. 그 밝은 표정이 너무 부러웠다. 단순히 웃는다고 그런 표정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여유가 있어야 표정이 부드러워진다. 여유는 시간에서 오지 않는다. 마음의 우선순위에서 온다. 일정이 아무리 빽빽해도 ‘덜 중요한 것’을 내려놓을 수 있으면 여유는 찾아온다.


나는 이제 조금 다르게 살고 싶다. 무엇을 더 잘할까보다 무엇을 그만둘까를 먼저 생각하려 한다. 의무감으로 참석하는 모임, ‘배워두면 언젠가 도움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등록한 강의들, 그 모든 것은 내 삶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작은 구멍들이었다. 그 구멍을 메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덜 하는 것’이었다.


심리학자 브렌 브라운(Brené Brown)은 말했다. “경계 설정은 나를 존중하는 방법이다(Boundaries are a way to respect yourself).” 그 말이 요즘 내 마음에 깊이 남는다. 일정과 사람, 일과 여가 사이에서 ‘경계’를 세우는 것은 단순한 거절의 기술이 아니라 자기 존중의 표현이다. 경계는 벽이 아니라 나를 지켜주는 투명한 울타리였다. 그동안 나는 ‘좋아요, 참여할게요’라는 말을 너무 쉽게 했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나를 소진시켰다. 이제는 “일정상 무리일 것 같아요.”라고 말할 줄 아는 용기를 가지려 한다.


10월 한 달을 돌아보니, 내게 필요한 건 새로운 목표도, 더 높은 성취도 아니었다. 오히려 ‘비움의 기술’이었다. 덜 바쁜 삶을 선택한다고 해서 게으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내 삶을 더 깊이 사랑하겠다는 선언이다. 앞으로의 나는 일을 조금 덜 하더라도 더 행복하게 일할 것이다. 약속을 조금 덜 잡더라도 더 의미 있는 사람들과 함께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웃는 표정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삶이란 결국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는 매일 무언가를 더하려 하고, 그로 인해 자신을 잃는다. 그러나 진짜 성숙은 더함이 아니라 덜함에서 온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여백을 남겨두는 사람, 그 여백 속에서 자신을 회복하는 사람이 진정 지혜로운 사람이다. 이제 나는 다시 숨을 고른다. 11월에는 ‘무엇을 더할까’보다 ‘무엇을 덜어낼까’를 묻는 사람이 되고 싶다. 덜어냄으로 단단해지고, 비움으로 나다워지는 삶. 그 느린 회복이 내 안의 평온을 다시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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