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 차 직장인의 깨달음
신입사원 시절, 나는 바쁘게 사는 게 좋은 줄 알았다. 시간을 쪼개 쓰는 사람이 유능한 사람이라 믿었다. 일찍 출근하고, 기한 내 보고서를 제출하며, 퇴근 후에는 외국어를 배우거나 자격증 공부를 했다.
결혼 후 1년이 지나 시작한 MBA 석사과정으로 인해 낮에는 회사, 밤에는 학교로 동분서주했다.
그 당시 교수님이 이렇게 말했다.
“수업도 많고, 과제도 많고, 시험도 많고 팀 프로젝트에 발표까지 많습니다. 다 잘하려 하지 말고, 과락 없이 이수하는 걸 목표로 하세요. 그래야 마음 편하게 공부할 수 있어요.”
교수님 말에는 ‘쉼’이 있었는데, 그때는 몰랐다.
나는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체력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지쳐가는 나를 보며 “의지가 약해서 그래”라며 스스로를 다그쳤다.
신혼 초, 주말이면 소파에 늘어져 있던 나를 남편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기대한 결혼생활이 이런 게 아닌데…’라는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그때의 나는 회사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집에서는 그저 쓰러지듯 누워있었다.
다시 돌아간다면 분명히 다르게 살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 ‘잘하고 싶은 마음’이 나를 쉬게 두지 않았다. 그 욕심 덕분에 동기들보다 빨리 인정받았지만,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끝이 없었다.
아이 둘을 낳고 키우며 겉으로는 우아한 커리어우먼 이었지만, 실상은 물밑에서 발을 끊임없이 움직이는 백조 같았다. 그럴듯한 직함 뒤에는 늘 열심히 하는 내가 있었고, 그 뒤에는 언제나 지친 내가 있었다.
2014년부터 골프를 시작했다. 승부욕이 강한 성격이라 잘 치고 싶었다. 없는 시간을 또 쪼개 레슨을 받고 연습을 거듭했다. 80대 스코어를 안정적으로 치게 되자, 라운드 제의가 줄줄이 이어졌다. 기분이 좋았다.
주말마다 필드에 나가고, 평일엔 일하고, 틈틈이 두세 개의 독서 모임을 병행했다.
‘독서 모임이 많으면 책도 더 읽게 되겠지.’ 라는 의도된 목적이 있었다.
독서모임 외에도 몇 개월 과정의 커리큘럼을 수강했고 배운 내용을 일에 접목하니 시너지도 났다. 겉보기엔 완벽한 선순환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잘 사는 법’을 착각하고 있었다. 열심히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 믿었다.
하버드대 의학과 심리학자 허버트 벤슨(Dr. Herbert Benson)은 스트레스 연구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도록 진화했지만, 현대사회에서는 멈추는 법을 잊어버렸다.”
올해만 해도 1월에는 결혼 20주년을 기념하여 7박 9일 이탈리아 가족여행을 다녀왔고, 7월에는 대련 워크숍, 8월에는 다낭 가족여행, 9월에는 청도로 연수를 다녀왔다. 어찌하다보니 과할 정도로 해외 일정을 소화했다. 결국 몸이 멈추라 말했다. 그제야 알았다. 나는 나 자신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며 살아왔다.
27년 만에 깨달았다.
욕심은 나를 성장시켰지만, 동시에 나를 소진시켰다.
그 욕심 덕분에 얻은 것들도 많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살았다.
한 해가 끝나가는 지금, 남은 52일의 목표는 단 하나다. 쉼이 있는 하루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저녁 약속을 최소화하고, 집에서 아이들과 소소한 대화를 나눈다. 송년회 초대가 여러 번 왔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무엇을 얼만큼 언제까지’ 해야 한다는 ‘목표’를 일부러 없앴다.
하고 싶으면 하고, 내키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하니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예전에는 ‘쉬는 것도 계획해야’ 했다면, 이제는 ‘쉼 그 자체가 나의 계획’이다.
테드(Ted) 강연에서 피코 아이어(Pico Iyer)는 이렇게 말했다.
“행복은 더 많은 일을 하는 데서 오지 않는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에서 온다.”
그 말이 이제야 온전히 이해된다.
쉼이 있어야 다시 나아갈 수 있다.
일을 잘하기 위해서라도 멈춤의 시간은 필요하다.
누군가는 내게 말한다.
“팀장님은 여전히 열정적이에요.”
그럴 때마다 나는 웃는다.
“이제는 열정보다는 여백이 더 소중해요.”
27년 전의 나는 ‘더’를 향해 달렸고, 지금의 나는 ‘덜’을 배우는 중이다.
예전엔 인정과 성취가 목적이었다면, 이제는 삶과 일의 ‘균형’이 중요하다.
나는 여전히 일하고, 배우고, 도전한다. 하지만 더 이상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않는다.
잠시 멈춘 그 자리에서야, 비로소 내가 얼마나 달려왔는지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것이 바로, 내가 그토록 찾던 진짜 ‘삶의 속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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