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많이 만나는 직업이라 그런지, 항상 약속이 많다. 보통은 점심은 약속이 많이 잡혀있는데, 저녁은 남편과 식사를 같이 하기 위해서다. 요즘은 조금 약속 빈도를 줄이긴 했어도 거절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들어, 만나자고 여러 번 연락 온 지인에게 또 퇴짜를 놓기가 민망해서 시간을 낸다던지, 멀리서 여행 온 지인들은 너무 서운해할 테니 만나야 한다던지, 혹은 서로 너무 바빠서 시간 맞추기가 어려운 사람인데 어쩌다 하루 시간이 맞을 경우이다.
오늘은 나보다 10살 남짓 많은 언니와의 점심 선약이 있었다. 종종 연락 와서 뭐 하냐 같이 점심 먹자는 언니다. 하지만 스케줄이 항상 있는 내가 번번이 미안하다며 거절을 했고, 내내 마음이 쓰였다. 나도 알고 있다. 동네에 사는 언니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려보고 아무도 없으면 나에게 마지막으로 물어본다는 것을. 이유야 어쨌든 간에 매번 하는 거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랜만에 점심 선약이 없는 날이어서, 지난주에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점심 약속을 잡았다. 딸의 입시문제로 풀이 죽어있을 거라는 생각이 마음이 쓰였다. 필라테스가 끝나면 12시쯤 될 거라며 같이 그즈음 같이 점심을 먹자고 좋아라 했다. 그리고 오늘 12시에 전화가 왔다. 기다리고 있다가 전화를 받으며 문손잡이를 잡았는데...
"네가 기다릴까 봐 전화했어. 나 필라테스는 마쳤는데, 그냥 집에 왔어."
머리 감기가 귀찮아서 혹은 날이 싸늘해서 너무 피곤하다는 둥의 어쭙잖은 변명을 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무례함이었다. 오랜만이다. 이런 무례함은. 이유를 묻는 것조차도 사치스러울 수 있는 의미 없는 관계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몇 년 전에도 한번 점심을 먹기로 하고서, 미안하다는 말없이 한 시간을 레스토랑에서 혼자 기다리게 만든 적이 있는 인사기도 하다. 그래. 차라리 잘 되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 언니 잘했네. 알겠어요."
"다음 주에 같이 점심 한번 먹자"
"응. 그래요"
전화를 끊고서 나의 반응에 나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졌다. 예전 같으면 울그락 불그락 화가 뿜뿜 났을 법도 한데, 무례함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나의 모습에 그동안 겪은 수많은 시험 같았던 상황에 고맙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오늘 나는 테스트를 통과했다. 유연하게 대처하기 테스트. ㅎ 아싸!
앞으로는 그녀를 위한 나의 시간은 없을 테니.. 유연하게 거절하며 단호하게 만나지 않을 나의 다음 테스트를 준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