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재밌게 봤습니다. 모든 것이 혼란이고 우연인, 킬러 안톤 쉬거에 의해 진행되는 서사는 영화 제목처럼 더 이상 기존의 질서와 지혜가 통하지 않는 혼란스러운 세상을 보여줍니다. 그래서일까, 정말 요즘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더 이상 노인을 위한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노인의 저 반대편에 있는 어린아이를 위한 나라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사회 문화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아이를 위한 나라는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네, 합계 출산율 0.7%대의 오늘날의 한국입니다.
언론이나 각종 리포트에서 이야기하는 원인은 유사한 것 같습니다. 집값이 비싸다. 양육비용이 많이 든다. 그러다 보니 결혼자체를 안 하거나 늦게 한다. 그런 배경에서 나라는 출산 비용을 지원해 주고 신혼부부 주택자금 제도를 운영했죠. 또, 경력단절을 막기 위해 육아휴직이나 단축 근무 등 제도를 적극 시행했습니다. 그럼에도 출산율은 끝을 모르고 추락했습니다.
또 다른 리포트에서는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에 "내 삶을 포기할 수 없다", "아이를 제대로 키워낼 자신이 없다"는 다소 감정적인 원인도 높은 비율로 등장합니다. 아이를 낳지 않는 1만 가지 이유와 같은 자극적인 제목도 등장합니다. 그만큼 아이를 낳아 키울 이유는 점점 없어지고 있죠. 쉽게 생각해서 내 아이가 나를 모시고 살 세상은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문제가 이거라는 것이죠?
정부 부처와 일을 할 상황이 더러 있었습니다. 어떠한 현상에 대해서 원인을 밝히고 그에 따른 해결을 해야 하는 자리였죠. 예상되는 원인과 문제점을 십 여개 나열하고 있자니, 부처 관계자 분이 한 마디로 정리해 줍니다. 그 뒤 해당 문제를 바탕으로 대안이 수립되고, 정책이 결정되었습니다. 물론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만, 당시 제가 관여했던 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잠시만 생각해도 나열되는 수많은 원인과 파생 문제들이 있음에도, 정책 보고서의 논지는 너무나도 명쾌하게 정리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무의 가지를 온통 쳐내듯이 뿌리부터 가지 끝까지 한줄기로 뻗어나가는 해결책은 깔끔했습니다. 적어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쯤 되면 이렇게 물어야겠네요? 아이를 왜 낳으셨어요?
어떤 리포트에서 읽고서 넌센스지만 공감했던 문장입니다. 수많은 통계적 분석으로 저출산의 원인을 밝혀내고 말미에 자조적으로 적은 글이더군요. 자, 아이를 낳는 분들은 왜 낳으셨나요?
경제적 여유가 충분해서 낳으셨나요? 아니면 미리 집을 살 수 있어서 낳으셨나요? 양육에 자신감이 있어서 낳으셨나요? 자신의 취향이나 라이프 스타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으셔서 낳으셨나요? 아니면, 강아지보다는 아이가 좋아서 낳으셨나요? 농담입니다.
지금의 육아는 과거의 육아보다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더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공동육아의 개념이 사라졌기 때문이며, 육아에 대한 정답이 넘쳐나고 있는 시대에 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릴 적 저는 집보다는 집 앞 공터나 산, 개울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당연히 혼자 동네 아이들, 형들하고 놀았죠. 어머니는 해 질 녘에 들어오는 저희를 맞이하곤 했죠. 제가 없어질라치면 옆집 아주머니나 아이에게 물어봐 찾으면 됩니다.
지금은 부모가 아이를 전적으로 돌봐야 합니다. 이 말은 물리적 주시를 포함합니다. 사람이 어떤 존재를 24시간 물리적으로 주시한다는 건 엄청난 에너지와 감정의 소모를 낳습니다. 결코 쉬운 육아가 아닙니다. 아이를 키워보니, 그리고 특별한 아이를 키우다 보니 니즈와 아쉬움이 명확해지더군요.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조건 없는 상시 돌봄/양육 제공
지금의 제도적 지원은 모두 "필요조건"을 충족시켜 주는 것에 올인하고 있습니다. 소위 경제력에 대한 부분이죠. 출산장려금을 주고, 어린이집 비용을 보전해 주는 방식의 제도는 한계가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수백조를 쏟아부었다고 말하는 지금의 출산율이 반증하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아이를 위한 충분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못 낳는 것"이 아니라 "안 낳는" 이유는 비교적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삶을 아이를 위해서만 사용하기 어렵다는 근본적인 진입장벽을 대폭 허물어야 합니다. 아쉽지만, 현실입니다.
돌봄을 이용하려 해도 맞벌이, 한부모 가정 우선순위 등 조건이 매우 까다롭습니다. 주양육자로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이를 위해 매진하고 나면 부모의 나이는 최소 40대 후반이 됩니다. 모든 재정적 지원을 초등 저학년까지의 상시 돌봄/양육으로 돌리고, 거기에 맞는 양질의 커리큘럼과 인력양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필요한 1인까지 조건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말이죠. 적어도 "어머님은 일이 없으니 애나 보세요"라고 하는 말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아야 하겠죠.
단순히 추정해볼까요? 1~7세 아동이 20년 기준 약 300만 명쯤 될겁니다. 1~10세로 확대하면 500만명 정도라고 추정해보겠습니다. 매월 아동 1인당 50만원 수준의 보육비용이 들어간다고 추정하면 연간 필요 예산은 약 30조 정도입니다. 10여년 전부터 거의 250~300조에 달하는 예산을 투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본인 가구 부담분을 덧붙인다면, 출산부터 저학년까지 국가가 책임지는 완전 보육지원이 전혀 불가능할까요?
아이는 현 인류의 마지막 판타지다.
아이를 낳을 이유는 적어도 20세기 중반부터는 전혀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낳을 이유가 없는데 왜 낳을까요? 저는 그 답을 놀이터에서 찾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남을 마지막 판타지는 아이들이어야 한다고 항상 생각합니다. 솔직하고, 순수하고, 맹목적이기도 하고, 엉뚱한 생명체는 인간에게는 참 판타지입니다. 환상은 현실을 떠났을 때 찾아오겠죠.
아이를 낳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산술적 계산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그렇기에, 요즘 아이를 낳는 사람들은 바보라는 어떤 진화학자분의 이야기가 씁쓸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맞죠, 바보입니다. 이 지독한 현실을 아름답게 만드는 바보라면 그 바보가 되렵니다.
결혼한, 결혼을 앞둔 모든 젊은이에게 아이를 낳으면 나라가 책임진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정책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물리적 양육을 포함한 공동양육의 시대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부모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으로 매도해서는 안됩니다. 지금의 육아는 결코 과거의 육아보다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