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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의 선택

(후회와 자책감에 대하여)

by 난아

두고두고 후회되는 선택이 있다.

“그때 그렇게 안 했더라면 지금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회귀물이 인기를 얻는 건 이런 심리의 반영이지 않을까 싶다.


내 선택이 나에 관한 일이라면 그나마 낫다. 내가 감당하면 되니까. 하지만 내 선택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인생이 달라졌다면 이것처럼 가슴을 휘저어놓는 일도 없을 것이다.


선택의 어려움과 딜레마, 그 후유증을 핍진하게 이야기한 소설이 있다. 퓰리처 상 수상 작가 윌리엄 스타이런의 <소피의 선택>에는 남매를 둔 폴란드 여인 소피가 나온다. 홀로코스트 피해자인 그녀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용소 실력자들에게 잘 보이려 노력한다. 어린 자식들을 살려야 하니까. 어느 날 유창한 독일어로 아이들을 살려달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독일 장교는 뜻밖의 제안을 한다. “좋아, 살려줄게. 그 대신 하나만 데리고 있어.” 순간 소피는 놀라서 대답을 하지 못한다. 폴란드인이라 특별히 봐주는 거라는, 원래는 아들 딸 둘 다 가스실에 보내야 하는데 너에게는 한 명을 살릴 수 있는 선택권을 주겠다는 장교의 말에 소피는 아연해하며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러자 장교는 둘 다 보내라는 명령을 내리고 순간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딸을 데려가라 말하고 아이를 밀쳐낸다. 딸은 울면서 가스실로 끌려가고 그 순간부터 소피와 아들은 고통의 굴레에 갇히게 된다. 죽지는 않았으나 심적 죽음을 경험한 것이다.


살아남은 아들은 큰 충격을 받고 소피 역시 평생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죄책감으로 고통받는다. 소피가 선택을 잘못한 것일까. 그녀는 자신이 딸을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그런 걸까. 괴로움에 평생 자신을 방치하며 삶을 포기하다 죽음을 맞이하면서야 비로소 행복한 표정을 짓는 소피에게 과연 선택권이 있기는 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선택을 가장한 강제는 아니었는지. 독일군의 강요 앞에 무엇을 선택할 수 있었을지, 선택한들 그 결과가 본인의 불행을 막을 수 있었을지 예측할 수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에게나 소피와 같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여러 선택의 순간들이 있었다. 그중 자식에 관한 결정은 두고두고 나를 괴롭게 했다. 엄마로서의 욕심을 내려놓고 그들이 진정 하고 싶어 했던 걸 우선시했어야 했는데, 그 나이대에만 할 수 있는 것들을 마음껏 하게 해 줄 것을, 부모로서 인생의 선배로서 정신적 서포터가 되어 주었어야 했는데 같은 생각에 잠 못 이룬 적이 많다. 사랑이 없거나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이 지나치게 많아서 생긴 일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지배하려 해서 어긋난 일들이 많았다. 가족과 관련된 선택의 결과는 엄청나게 큰 바위가 되어 내 가슴을 짓눌렀다.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하고 싶었다.


어느 고전의 문장이 떠오른다. 사람에게는 커다란 운명이란 게 있다는 것, 이 흐름은 인생 전반에 걸친 것이기 때문에 한순간의 선택으로 운명이 완전히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 인생에 용기를 가질 것을 말하는 내용이었다.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은 지되 지나친 자책감으로 괴로워하지는 말라는, 마음의 연료 같은 말이었다.


우리는 가장 두렵고 외로운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람의 일은 의지적으로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아 우리의 근원을 돌아보고 세상의 원리를 들여다보게 되는 듯하다.


생존의 밑거름은 생에 대한 긍정의 에너지임을 인지하고 이제부터라도 덜 어리석은 선택을 하기를 바라며 오늘도 버티고 살아본다. 여건이 무르익어 때가 되면 마침내 좋은 열매가 맺힐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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