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와 평가의 그 굴레에 포기한다면
비교와 후회, 그리고 포기.
그 세 친구는 언제나
작은 화면에서 온다네.
좋은 일엔 질투하고,
슬픈 일엔 안도하는
각자의 삶, 그 아름다운 빛은 무시하네.
작은 화면에
작은 속삭임에
작은 마음은 무너지네.
그들을 악마로 만들면,
당신도 평가의 악마가 된다네.
그렇게 무너지고 망가지게 된다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이 말은 분명 마음에 대한 전문가가 만들었을 겁니다. 남의 성공과 축하할 일 앞에 늘 ‘비교’라는 불청객을 초대하곤 합니다. 그러면 어느새 이 친구가 후회를 또 후회가 포기를 불러옵니다. 물론, ‘메타인지’와 같이 스스로를 알기 위해, 그런 깊은 성찰을 위해서 비교는 꽤 좋은 선생님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작은 핸드폰 화면을 보며 남을 맹목적으로 부러워하고 자신의 처지를 낙담하며 포기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비교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가끔 그런 상상을 합니다.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를 공격하거나, 비난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쓸데없는 걱정인 것 같아 외면하기도 했지만, 내면의 불안감에 올바르게 대처하는 것이 아닌 듯하여 어느 날 골똘히 생각해 봤습니다. 그리고 결론은 ‘그냥 웃자.’ 였습니다. 약간은 김이 샐 수도 있지만, 그렇게 결단했습니다. 누군가는 앞장서서 싸우고, 누군가는 자신의 주장을 위해 목숨을 걸겠지만, 그것은 제가 선택할 길이 아니었습니다. 비폭력 운동의 간디처럼, 자기 원수까지도 사랑한 수많은 성인의 모습처럼, 그저 웃어주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그냥 좋은 일은 축하하기로, 슬픈 일에는 진심으로 위로하기로, 그냥 그렇게 단순하게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과거에 대한 후회, 내가 가지지 못한 조건들에 대해 울분을 토하기보다, 그저 웃으며 지금을, 그리고 앞으로의 행복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비교는 높은 확률로 평가를 불러옵니다. 그리고, 인생의 어느 한 지점을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한다면 굉장히 재미있는 일이 벌어집니다. 여기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나마도 삼수 끝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지만, 성적도 별로고 늘상 왕따를 당하는 남자.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휴학하고 낙제에 낙제를 거듭하는 남자. 아마 이 젊은이를 만나면 당장 여러 가지 조언과 평가를 날릴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영국을 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으로 이끈 수상인 처칠입니다. 그런 그가 옥스퍼드 졸업식장에서 한 연설은 ‘Never! Never! Never! Never! Never! Give up!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였는데, 정말 수많은 사람의 삶을 바꾼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처칠도 사람이기에 공과 과가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건 시기에 따라 순간에 따라 평가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넓게 봤으면 좋겠습니다. 내 눈에 한심하게 보일지라도, 지금 당장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궂은 비를 맞아주는 이의 곁에서 같이 비를 맞아주는 것. 그러면 그가 무지개를 볼 때 우리도 곁에서 같이 웃을 수 있을 테니 말이죠.
삶을 파괴하는 악마가 되는 것은 너무나 쉽습니다. 작은 화면을 끊임없이 탐하며, 질투하고, 깎아내리고 안도합니다. 그 결과는 자신에 대한 혐오, 세상에 대한 분노, 그렇게 빌런이 되어갑니다. 처칠이 만약 젊은 날의 실패와 좌절에 무릎 꿇었다면, 역사의 흐름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그가 연설에서 한 말처럼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하는 비교도, 남의 험담과 나를 깎아내리는 말 앞에서도, 우리는 후회와 포기라는 악마를 불러오기보다 그저 웃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훌훌 털고, 한 걸음을 걸어나갈 때, 당신은 진정 당신이 원하는 행복에 닿을 것입니다. 그러길 마음 다해 응원합니다.
‘작은 화면을 떠나 넓은 마음으로. 기쁜 일에 기뻐하고, 훌훌 털고 걸어 나가기를.’
- 그 어떤 것보다 경이로운 당신의 손에 ‘강유랑’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