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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w&Slow, 미국의 영혼, 바비큐의 세계

미국 시리즈 2편

by 박정수

지난 1편에서 우리는 미국의 팁 문화와 디너파티 등 미국의 사회적 식사 규범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집 밖, 드넓은 마당이나 거대한 스모커(Smoker)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곳은 미국인들의 주말을 지배하고, 지역의 자부심을 격돌시키며,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축제이자 '종교'가 되는 '아메리칸 바비큐(BBQ)'의 성지입니다.


먼저, 우리가 가진 가장 큰 오해부터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릴링(Grilling)'과 '바비큐(Barbecue)'는 완전히 다르다

우리가 흔히 '바비큐 파티'라고 부르는 것, 즉 뒷마당 그릴(Grill)에서 높은 온도로 햄버거 패티나 핫도그, 스테이크를 '빠르게 구워' 먹는 행위는 미국에서는 '그릴링(Grilling)'이라고 부릅니다.

진정한 의미의 '아메리칸 바비큐'는 정반대의 개념입니다. 그것은 '로우 앤 슬로(Low & Slow)', 즉 '낮은 온도(약 100~135°C)에서, 오랜 시간(최소 4시간에서 18시간 이상) 동안, 간접적인 열과 '나무 연기(Smoke)'를 이용해 고기를 '훈연'하는 조리법을 의미합니다.


이 지루하고 지난한 과정은 단순히 고기를 익히는 기술이 아닙니다. 그것은 밤새 불을 지키는 인내의 시간이자, 세대를 거쳐 내려온 비법 소스의 역사이며, 고기의 질긴 결합조직이 부드럽게 녹아내리기를 기다리는 '기다림의 미학'입니다.



BBQ의 기원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문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초기 원주민들은 고기를 불에 구워 먹었고, 유럽의 식민지 개척자들은 이 전통을 이어받았습니다. 19세기 중반, 특히 남북전쟁 이후 BBQ는 남부 지역에서 대중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시기에 BBQ는 사회적 모임이나 축제와 같은 중요한 행사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고 해요.


그리고 미국은 하나의 바비큐 스타일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남부의 '바비큐 벨트(BBQ Belt)'라 불리는 지역들은 각자 다른 고기 부위, 다른 훈연 방식, 그리고 완전히 다른 소스를 사용하며, 자신의 스타일이 '진짜 바비큐'라고 주장합니다. 이 지역적 자부심이야말로 미국 바비큐의 핵심입니다. 이제 미국의 4대 바비큐 성지를 순례해 보겠습니다.


1. 텍사스 (Texas): 오직 소고기, 오직 연기 (Beef is God)

지역: 텍사스 중부 (오스틴, 록하트 등)

고기: 소고기(Beef). 이곳은 미국의 최대 소고기 산지입니다. 다른 고기는 거의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대표 메뉴: 브리스킷 (Brisket - 차돌양지) 텍사스 바비큐의 알파이자 오메가. 소의 가슴 부위인 브리스킷은 12시간 이상을 훈연하여, 겉은 후추와 소금으로 까맣게 탄 듯한 '바크(Bark)'가 형성되고, 속은 육즙이 흘러 넘 칠 정도로 부드럽게 변합니다. 셰프는 이 브리스킷을 썰어 저울에 달아, 트레이 위의 유산지(Butcher Paper)에 툭 얹어줍니다.

소스와 훈연: "좋은 고기는 소스가 필요 없다." 텍사스, 특히 중부 스타일은 소스를 거의 쓰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오직 소금과 굵은 후추로만 간을 하고('달마티안 럽'), '오크(Oak, 참나무)' 연기의 향으로만 승부합니다. 연기 자체가 소스인 셈입니다.

함께 즐기는 것: 할라피뇨와 함께 절인 소시지(Sausage), 피클, 양파 슬라이스, 그리고 평범한 식빵.


2. 캔자스시티 (Kansas City): 달콤한 소스의 멜팅 팟 (The Sauce Capital)

지역: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고기: 멜팅 팟(Melting Pot). "모든 고기를 환영한다." 텍사스의 소고기, 캐롤라이나의 돼지고기, 멤피스의 립까지 모든 것을 받아들여 자신만의 스타일로 만들었습니다.

대표 메뉴: 폭 립 (Pork Ribs)과 번트 엔즈 (Burnt Ends). 폭립은 돼지갈비에 달콤한 소스를 발라가며 훈연한, 우리가 '바비큐 립'하면 떠올리는 그 이미지입니다. 번트 엔즈는 브리스킷을 훈연할 때 가장 바삭하게 익은 끝부분(Point)을 잘라내, 달콤한 소스에 버무려 한 번 더 조리한 것. 캔자스시티의 별미입니다.

소스와 훈연: "소스가 왕이다." 이곳은 전 세계 바비큐 소스의 수도입니다. 토마토케첩과 당밀(Molasses)을 베이스로 한, 걸쭉하고, 달콤하며, 톡 쏘고, 스모키 한 갈색 소스가 특징입니다. 우리가 마트에서 사는 '클래식 바비큐 소스'는 대부분 이 캔자스시티 스타일에 뿌리를 둡니다.


3. 캐롤라이나 (The Carolinas): 돼지고기와 식초의 원조 (Pork & Vinegar)

지역: 노스캐롤라이나 & 사우스캐롤라이나

고기: 돼지고기(Pork). 미국 바비큐의 원형이 시작된 곳입니다.

대표 메뉴: 풀드 포크 (Pulled Pork). 노스캐롤라이나 (동부)는 '홀 호그(Whole Hog)', 즉 돼지 통구이를 고집합니다. 오랜 시간 훈연한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해체하여 잘게 다진 뒤, 모든 부위를 섞어 냅니다. 반면 노스캐롤라이나 (서부/렉싱턴)은 돼지 어깨살(Pork Shoulder) 부위만 사용합니다.

소스와 훈연: "식초가 핵심이다." 캐롤라이나의 소스 전쟁은 격렬합니다. NC 동부는 토마토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맑은 식초와 고춧가루, 후추로만 만든 톡 쏘는 소스. 가장 원시적이고 순수한 맛입니다. 그리고 NC 서부 (렉싱턴)은 동부 소스에 '케첩'을 살짝 더해 붉은빛이 돌고 약간의 단맛이 추가됩니다. (일명 '레드 딥') 마지막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는 '머스터드 벨트(Mustard Belt)'라 불리며, 미국에서 유일하게 겨자를 베이스로 한 노랗고 새콤달콤한 소스를 씁니다.

함께 즐기는 것: 잘게 썬 양배추 샐러드인 '코울슬로(Coleslaw)', 그리고 이 풀드 포크와 코울슬로를 햄버거 번에 끼워 먹는 샌드위치.


4. 멤피스 (Memphis): 립의 두 얼굴, 드라이 vs 웨트 (Dry vs. Wet Ribs)

지역: 테네시주 멤피스

고기: 돼지갈비(Pork Ribs)와 풀드 포크 샌드위치.

대표 메뉴: 드라이 립 (Dry Ribs) vs. 웨트 립 (Wet Ribs) 멤피스에서는 립을 주문할 때 반드시 '드라이'인지 '웨트'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드라이 립: 멤피스의 자부심. 훈연이 끝난 립에 소스를 바르지 않고, '파프리카, 마늘, 양파, 카이엔 페퍼' 등 수십 가지 재료가 배합된 복잡한 '스파이스 럽(Rub)' 가루를 듬뿍 뿌려 마무리합니다. 고기 본연의 맛과 향신료의 조화를 즐깁니다.

웨트 립: 캔자스시티보다는 묽고, 캐롤라이나보다는 달콤한, '새콤달콤한 토마토 기반 소스'를 훈연 중간과 마지막에 덧발라 윤기 나게 구워낸 립입니다.

소스와 훈연: 히코리(Hickory) 나무 훈연을 선호하며, 소스는 묽고 새콤한(Tangy) 것이 특징입니다.


바비큐는 단순한 요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텍사스인의 자부심이고, 캐롤라이나의 역사이며, 캔자스시티의 포용력입니다. 이 '로우 앤 슬로'의 철학을 이해할 때, 비로소 미국의 진짜 영혼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이민자들의 역사가 빚어낸 또 다른 미국의 맛, 즉 남부의 '소울 푸드(Soul Food)', 루이지애나의 '케이준/크리올(Cajun/Creole)', 그리고 텍사스와 멕시코의 경계에서 탄생한 '텍스-멕스(Tex-Mex)'의 세계로 떠나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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