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의대가 남초 구성이던 20년 전, 갓 입학한 나는 얼떨결에 농구동아리에 가입(당)했다.
남녀공학을 다녔던 덕분에 이성의 친구들이 적지 않았고 그들은 학창 시절 내내 늘 농구며 축구를 했지만, 나는 원래 모든 종류의 운동에 별 흥미가 없었고 경기의 흐름을 길게 볼 기회도 많지 않았기에 신입 매니저의 본분을 다하느라 한 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찰’하는 것은 의외로 아주 새로운 경험이었다.
처음에는 그 분위기가 너무 낯설었고, 다음에는 단체 운동의 재미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는데, 정작 한 학기가 지날 즈음 나를 압도한 것은 여성들의 사회적 성공 확률이 아직도 낮은 이유가 바로 이 ‘단체운동’ 문화의 부재 때문이겠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
농구나 축구처럼 ‘포지션’을 가지고 여럿이 하는 운동에는 강력한 lesson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는데, 포지션을 정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그리고 본인이 스스로를 평가해 각자의 능력에 맞는 옷을 입는 것이 그 첫 번째로,
저 놈은 나보다 키가 크고,
저 ㅅㄲ는 나보다 스피드가 좋고,
저 찐따는 나랑 안 친하지만 슈팅이 정확하고..
하는 식으로 엉성할지언정 본인과 타인의 장단점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인정함으로써 각자의 강점을 살려 협력하는 연습이 된다.
두 번째로, 경기를 하는 동안에 그곳에는 센터가 있고, 포워드가 있고, 가드가 있고, 팀 리더의 사인에 따라야 하는 순간들이 오고, 개인적인 친소를 떠나 다른 포지션을 존중해야 하고, 내가 어시스트를 잘해서 들어간 공인데 어쨌든 저 놈이 MVP가 되고, 그래서 좀 기분이 아쉽고 씁쓸하긴 하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우리 팀이 승리한 건 또 좋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팀플레이를 배운다.
또한 팀 내에서의 협력과 동시에 팀 간의 경쟁은 그렇게 냉정할 수가 없어서, 애매한 반칙과 태클이 난무하는 가운데 서로 암묵적인 선을 합의하고 그걸 넘는 자에게는 분명한 패널티를 주고 득점 수를 칼같이 계산해 승패를 반드시 가려내고 패배의 기록은 꼭 갚아주리라 설욕전을 고대하며 와신상담하되 압도적인 선수나 팀 앞에서는 내 주제를 알고 현실적으로 목표치를 조정하기도 한다.
높은 자와 낮은 자,
명령하는 자와 복종하는 자,
전략과 다툼과 기만과 죽음이 출현하는 전쟁놀이와 게임은 심지어 유아기부터 시작하니 더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이 다 연습이다.
사회생활 가운데 사람들과 부대끼고 조직을 만들고 위계를 형성하며 성공을 향해 전략적으로 움직이는 연습.
개인보다 팀을 생각해야 할 때와 내 실리를 챙겨야 할 때를 아는 연습.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구분하고, 이성과 감정의 밸런스를 맞추는 연습.
때로는 가면을 쓰고 모략을 꾸미고 의도적으로 몸을 낮출 줄도 아는 연습.
남자들이라고 다 성공적으로 이런 기술들을 수행해 내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여자들에 비해 훨씬 많은 사회적 경우의 수가 학습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내 경쟁력에 더 유리하다. 심지어 우리나라 남자들은 군대도 가지 않는가!)
기술의 정점이 오랜 수련 끝에 장인이 된 자에게 있듯, Hierarchy의 정점은 계급에 대한 이해와 학습,
조직에 대한 적응이 더 많이 된 존재가 차지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
이런 이유로,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딸을 단체운동에 참여시킨다.
밀려 나 봐야 하고, 져 봐야 하고, 체력의 중요성을 알아야 하고, 내 의견을 조율하거나 남을 설득할 줄 알아야 하고, 남이 돋보이는 상황에 토라지지 않아야 하고, 나아가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어야 하고, 함께 이뤄 낸 승리의 기쁨을 누려 본 경험을 쌓아야 한다.
그 연습이 되어야, 대등한 경쟁을 할 수 있고,
그래야 정점에 가까워진다.
-
나는 내 딸이 여자 아이답게 자라기를 바란다.
여자 아이답다는 말은 예쁘다는 말이고, 사랑스럽다는 말이고, 건강하다는 말이고, 지혜롭다는 말이고, 담대하다는 말이고, 포용력 있다는 말이다.
그런 ‘여자아이’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올바르게 훈련될 때에, 우아한 여성성과 유연한 사회성과 탁월한 능력을 가진 아름다운 사람으로 성장할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