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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lison Lee Nov 25. 2021

매혹자들


#1


나는 스칼렛을 사랑했다.


얼마 전 SNS에서 어린 시절 반복해 본 영화가

그 사람을 잘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을 본 적이 있는데,

내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그런 영화였다.


아직 사춘기에도 채 들어서지 못한

4학년 여자아이의 눈에

초록색 눈동자와 깃털 같은 속눈썹을 깜박이면서

애교 있게 미소 띤 채 대담한 말투와 몸짓을 휘둘러

제 멋대로 투명하게 속을 다 내어 보이면서도

결국 원하는 모든 걸 갖던 스칼렛은

여성적 아름다움과 매혹의 결정체였다.


아, 그러니까,

여자란 건 저런 숨도 못 쉬게 예쁜 존재로구나.


게다가 그 예쁜 스칼렛은 또

어찌나 야무지고 주도적이며 유능하기까지 한지,

폐허가 된 타라에서 흙 묻은 무를 씹으며

다시는 굶주리지 않겠노라 다짐하더니

온 가족을 제 등에 다 업은 채

기어코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야 만다.

더 놀라운 건 그 과정에서

거칠고 우악스럽게 여성성을 잃어가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뒤에서 욕을 바가지로 먹을지언정

자신의 캐릭터를 지키고, 활용하고,

조작하고, 극대화시킨다는 것.


아니, 윤리와 도덕은 나는 모르겠고,

본능적으로 이런 여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냐고.

극 전체를 관통하며 눈부시게 빛나던

스칼렛의 매력과 그녀의 성장은

어린 시절의 내가 좇아 헤매던

소녀의 취향이자 아이덴티티이며 이상이었다.


#2


일 년에 한두 번씩은 어김없이

3시간 40분짜리의 이 거대한 서사를 되풀이하면서

다음으로 내가 빠져든 사람은

멜라니 해밀턴, 애슐리의 아내.

내 사랑 스칼렛의 정적이자 민폐 가식덩어리의

얄밉던 여자였는데,


그게 아니네, 저게 가식이 아니었네.


조금 더 자란 내가 새롭게 발견한 것은

우아한 미소로 잘 감춘 영리한 포커페이스였고

부드러운 설득력 속에 번뜩이는 냉철함이었다.


그녀는 자선 댄스파티에서 여성 파트너를 경매에 올려 전쟁기금을 모아도 좋다는 충격적인 결정조차 그녀가 허락했다는 이유 하나로 모두를 납득시키고야 마는 조용하고도 압도적인 도덕적 권위의 소유자임과 동시에

스칼렛이 죽인 북군을 함께 처리하기 위해 아마 태어나서 처음  보았을 거짓말을 쉽게 둘러대고 피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알몸이 되는 것마저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행동력을 겸비한 과감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녀들은 진짜 우정을 나누지 않았는가.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연적이 되는

뻔하디 뻔한 구도에서 멋지게 탈피해

피란길과 전후의 폐허에서 협력하고 의지하며

동지애를 쌓아가는데


 관계를 시작한 것은 멜라니의 성숙함이었고,  과정을 가능하게  것은 스칼렛의 책임감이었으며,

 특별한 연대를 완성시킨 것은  사람 사이의 신의였으니 그것은 과연 로맨스보다 위대한 우정이었다.


#3


유모, 사랑하는 나의 유모.


나는 그녀가 정말 좋았다.

그녀 특유의 확고한 원칙과 노련함으로

신분과 남녀의 차별 따위는 간단히 무시한 채

천하의 스칼렛에게조차 소리를 꽥꽥 지르며

야단치고 잔소리를 쏟아붓던 유모.


상대가 흑인이건 백인이건 남자건 여자건

그런 건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지.

해야 할 일이 뭔지, 옳은 일이 뭔지를

생각하고 움직였을 뿐.


그녀의 눈에는 스스로의 역할에 대한

꺼지지 않는 확신이 있었고

거친 입술에는 사람에 대한 깊고도 진한 애정이 있었으며

그 모든 것은 그녀의 커리어로 차곡차곡 쌓여

결국 명예가 되었다.

레트가 선물한 새빨간 패티코트를

오랜 고민 끝에 꺼내 입은 모습은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베테랑으로서

그 꾸준한 존재가 주는 신실함의 가치를 확인시켜 준다.


#4


스칼렛의 엄마이자

오하라가의 안주인으로 등장하는 엘렌 오하라  


나는 이전까지 딸의 아이덴티티에만 속해 있었으므로

그녀의 존재를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아이들을 낳은 뒤 다시 본 극 속에는

뿌리 깊은 나무와도 같이

가문 전체를 지탱하는 고고한 여인이 숨어 있었다.


그녀는 몇 장면으로 아주 짧게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모든 순간마다

아버지보다  권위 있고 지혜로운 집안의  어른으로, 남편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를 받는 가문의 최종 결정권자로, 딸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애로운 어머니로,

심지어는 죽기까지

이웃의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으니

도대체가 너무 완벽해서 현실감이 없을 지경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런 그녀의 얼굴과 몸짓에

스칼렛의 고혹과 멜라니의 우아함마저 공존한다는 것이다!)


#5


벨 와틀링은 사교 클럽의 호스티스로

유곽으로 암시되는 살롱을 운영하는 여인인데

주인공들만큼 자주 언급되지는 않지만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이 영화를 이해하는 나에게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그녀의 역할은

멸시하는 주변의 눈이나 천박한 평판과 무관하게

레트의 마음을 알아주는 좋은 친구이자

어려운 사람들을 기꺼이 나서서 돕는 독지가이며

고마움을 표시할  알고  끼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경우 있고 양심 바른 여성으로 서술된다.


사회의 편협한 시선에 상처 받기도 하지만

그것에 분노하여 세상을 탓하거나 포기하거나

혹은 어긋나지 않고

자신이   있는 일을 하며 스스로의 고귀함을 지켜가는 모습은 그녀의 삶을 기꺼이 존경받을 만한 것으로 만들었다.


#6


바람과 함께 사라져 간 다섯 여인의 삶을 보라.


이 이상이 있겠는가.

여성성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

그녀들의 삶을 존중하고,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녀들은 1800년대의 고단한 삶을,

전쟁의 가혹한 땅을,

노예제도의 험한 골짜기를,

당대 여성을 가두던 모든 제약의 벽을 넘었다.

나는 이토록 자립적이고도 용맹한 인간을 또 알지 못한다.


이것이 내가 아는 여성주의적 삶이므로

나는 ‘여성은 매혹적이어야 한다’는 명제에 동의한다.


그 매혹이란 살아 날뛰는 모든 것에 대한 찬양,

능력과 열정과 헌신과 인간애의 또 다른 이름이기에

아마도 내 마음속의 여자아이는

스칼렛처럼 울부짖을 것이고,

멜라니처럼 웃을 것이며

유모처럼 억척스럽게,

엘렌처럼 우아하게,

벨처럼 자유롭게 살 것이다.


#7


어떠한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일궈내며  것인지,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지킬 것인지

사회적으로는 어째서 나의 몫을 이루어야 하며

나아가

이 땅의 위태로운 곳에 내가 어떤 도움 되는 일을 할 수 있을지.

사실 그것은 앞에 ‘여성으로서’가 붙건 붙지 않건

인류의 누구에게라도

달라질 것이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이 여성성을 입은 채 피어날 때에

남성성이 표현할 수 있는 모습에 비해

생명력 넘치는 아름다움과 감동이

몇 갑절이나 더 찬란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마 내가 남자였다면 ‘대부’를 필름이 닳도록 보고

또 비슷한 글을 썼겠지만)


나는 사무치게 사랑한다,


매혹자들로 촘촘히 채워진 이 영화를,

끊임없이 우리의 명예에 대해 말하는 이 이야기를,

여성으로서 주어진 나의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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