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부터 좀 챙겨."
이 말을 누군가에게 건네는 게
당신은 쉽지 않았으면 합니다.
쌓여있는 집안일,
매 시간 긴장의 연속인 육아,
거기에 밀려드는 회사일까지.
하루를 쓰고 나면
껍데기만 남은 나와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핏기 바랜 입술,
염색 시기를 놓쳐 절반쯤 검게 자란 머리카락.
거울 속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볼 때면
그 말들은 탁구공처럼 내 안에서 튕겨져 나가고 맙니다.
정말 나를 챙길 시간이 가능하긴 한 걸까요.
나만 이런 걸까요.
나에겐 도저히 허락되지 않는 시간들이
왜 다른 이들에겐 너무 쉽게
가능한 일이 되는 걸까요.
나는 오래전부터 늘 느껴왔습니다.
나에게 쓰는 모든 것은 사치라고.
시간도, 체력도 나는 늘 바닥이었으니까요.
운동을 하라는,
쉬라는,
진심으로 걱정 어린 그 말들이
왜 내겐 불쾌함으로 다가왔는지
지금도 나는 알 수가 없습니다.
매일을 이렇게 버티다 보면
꼭 탈이 났습니다.
이를 악물고 버티다 보면
결국 나는 무너져 있었습니다.
아프고 싶어서 아픈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견디라 해서 견뎌봤지만
몸과 마음은 늘 같은 자리에서
함께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래서 바랐습니다.
제발, 하루가 48시간일 순 없을까.
차라리 내가 두 명일 순 없을까.
바보 같은 상상을 하며 스스로를 몰아붙였고,
그 끝엔 공허함만이 남았습니다.
그 공허함을 채워줄 대타가 없다는 사실이
더 마음을 사무치게 했습니다.
남편은 어느 날 내게 말했습니다.
"너는 보기만 해도 숨 막힐 만큼 바빠 보여."
쉬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간절한데,
어째서 나는 그럴 수 없을까.
곰곰이 생각해 본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답은 아무 의미가 없었죠.
그러던 어느 날,
한 sns 댓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시답잖은 위로가 가식처럼 느껴질 때,
밥 한 끼 먹으라며 보내준 기프트콘 하나가
더 큰 위로였다는 이야기.
그 문장이 이상하게도
내 마음에 오래 잔상처럼 남았습니다.
그리고 곧 떠올랐습니다.
감기에 걸렸을 때, 삼계탕을 포장해 30분 거리를 달려온 K.
숨 쉬기조차 벅찼을 때, 무더위를 뚫고 홍삼 세트를 들고 와준 H.
"남의 밥이 최고지." 라며 죽 쿠폰을 보내주던 J까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았던 건
그들의 진심이었습니다.
기프트콘 하나에 위로가 되었다는 그녀는
스스로를 속물 같다 말했지요.
괜스레 내 마음도 뜨끔거렸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속물일까요.
그런데 문득,
그게 뭐 그리 중요한가 싶었습니다.
속물이면 좀 어떤가요.
열 번이고, 백 번이고 그런 마음이 들어도
나는 오늘도 그 힘으로 살아내고 있는 걸요.
나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 힘은 단순히 선물 때문이 아니라는 걸.
그 안에는 "제발 무너지지 말아 줘."라는 다정함이 있었고,
나를 위해 오래 고민했을 시간의 흔적이 있었고,
내게 건네기까지의
그들의 걱정과 진심이 담겨 있었다는 것을요.
그래서 저도 누군가에게 속물이 돼보려 합니다.
그들이 나에게 그러했듯,
나도 누군가에게
충분히 멋진 속물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작고 꾸준한 속물들의 마음이
어쩌면 누군가의 하루의 세상을
바꾸는 일이 되도록
내가 그러했듯이 그런 마음 하나가
숨 막히던 순간을 견디게 하고,
잊고 있던 자신을 일으켜 세우기도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마음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흘러가
보이지 않는 다정의 길이 되어
또 다른 속물로 자라날 것이라
나는 간절히 믿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