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심판

예수의 심판

by 최연수

신문에 “예수의 인권”이란 글이 실렸다. 캐나다의 돌라 인다이디스라는 변호사가 국제사법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사법권 남용과 악의적인 起訴(기소)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했으므로, 재판과 유죄 판결, 그에 따른 사형 선고를 飜覆(번복)해달라는 취지다. 곧 불법적인 재판에 의한 예수의 사형 선고는 인권을 침해했으므로, 유죄 판결을 破棄(파기) 해 달라는 것이다.

그는 첫째 빌라도 총독이 그 사안을 다룰 관할권이 없었으며, 그래서 예수를 헤롯왕에게 보내었는데 되돌려 보내자 군중들의 강압에 의해 사형 선고를 내렸다는 것, 둘째 재판 중 審問(심문) 방식 즉 법적 절차가 아직 진행 중인데 내려진 형벌 등 법적 瑕疵(하자) 투성이라는 것, 심지어 당시 갈릴리 법은 신성 모독에 관한 죄는 돌에 맞아 죽는 것인데,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재판 자체가 무효라는 것이다.

북한의 제2인자인 장성택 처형이 전 세계의 驚愕(경악)을 일으킨 무렵에 상영된 영화 ‘변호인’이 화제다. 소위 공안사범 부림(釜林) 사건을 소재로 한 것인데 대박을 터뜨린 영화다. 잇달아 33년이 지난 며칠 전 때마침 이 사건이 재심공판에서 피고인들이 무죄 선고를 받았다. 법리에 어두운 우리가 재심 재판 결과에 대해서 曰可曰否(왈가왈부)할 수는 없고, 인권이 침해된 오판이었다면 다행한 일이다.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으며, 예수도 결혼했다는 荒唐無稽(황당무계)한 영화 ‘다빈치 코드’ 이후, 새삼스럽게 사실(fact)과 허구(fiction)의 경계가 무엇이고, 사실에 허구를 덧씌운 합성어인 팩션(faction)의 영역이 어디까지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예술의 창작 혹은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糊塗(호도)하는 이런 일은, 인류의 종말이 가까울수록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독실한 크리스천일 것이라는 인다이디스의 忠情(충정)은 이해되지만, 이 提訴(제소)는 해프닝으로 끝날 것이다. 국제사법재판소나 빌라도가 법적 관할권이 없는 것은 똑같기 때문이다. 국제사법재판소는 한 국가에 의해 다른 국가를 상대로 제소된 사건만을 심리하기 때문이다.

한편 ’ 07년도에 미국에서 있었던 ‘신의 고소’ 사건이 떠오른다. 상원 의원이면서 인권운동가인 체임버스는 하나님의 테러리스트식 위협을 중단하도록 영구 금지 명령을 내려달라는 청구다. 안티 크리스천일 것이라 추측된 그는, 無所不爲(무소불위)의 존재라면 피고의 자격이 있다는 것이고, 災殃(재앙)을 구경만 하는 하나님을 방관할 수 없어 고소하노라고 했다. 이 사건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이것 역시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았을까 그 후문을 듣지 못했다.

그리고 TV 코미디언 토크 쇼 진행자 엘렌 드제너러스가, “신을 인터뷰 하러 갔다. 사무실 앞에서 한참 기다리고 있었더니, 드디어 문을 열고 나온 이는 우아한 흑인 중년 여성이었다”라고 하였다. 잔뜩 호기심으로 가슴 부풀던 시청자들은 폭소를 했을 것이다.

찰스 다윈의 무신론(無神論), 니체의 사신론(死神論), 사르트르의 살신론(殺神論).... 이와 같이 하나님 또는 예수님을 책 속에 벌거벗겨 뉘어 놓고, 예리한 筆鋒(필봉)으로 해부하는 일, 법정에 세워놓고 제2의 빌라도가 되어 인민재판으로 십자가에 못 박는 일, TV 쇼 프로에 초청해 피에로 역을 맡겨 배꼽이 빠지도록 웃기는 일이 수그러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자유라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풀어주고 빵을 주었다. 바야흐로 사람들은 당신이 원하는 자유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자유의 몸이 되었고, 기적과 신비와 권위라는 이 세 가지의 힘 위에다가 지상 왕국을 구축하였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대심문관이 한 彈劾(탄핵)의 그 말이 떠오른다. 16세기 스페인에 환생했다는 종교 寓話(우화)의 한 장면인데, 대심문관은 되살아난 예수를 감옥에 집어넣으면서, 교회가 나약한 인간을 엄하게 다스려 질서를 잡아 왔다는 주장을 펼친다. 하지만 예수는 대꾸를 않고 침묵하다가, 대심문관에게 다가가 따뜻하게 입 맞춘다. 빌라도의 심문 앞에서 침묵하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는 서두의 말을 反芻(반추)하게 되는 장면이 이 소설의 白眉(백미)가 아닐 수 없다.

무고하게 단죄된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그 어떤 충성이나, 빈 무덤이라도 찾아가서 육시(戮屍)라도 하고 싶은 그 어떤 逆謀(역모)에도, 예수님은 침묵과 미소로 내려다보고만 있을 것 같다. 이미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상세하게 생명책을 기록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땅에 심문관의 대심문관, 재판관의 대재판관으로서 재림하여, 최후의 심판을 할 때 그 생명책을 펼쳐 놓고, 양과 염소를 가르며 알곡과 쭉정이를 가를 것이다. 인다이디스여, 체임버스여! 웅변은 은이지만 침묵은 금이라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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