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우타령
차고 있는 수갑엔
자유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다달은 옥문엔
자유의 집이란 간판이 붙어있다.
노예 시장 한 가운데엔
자유의 여신상이 서있고,
수용소군도엔
자유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내 자유를 위해
네 자유를 빼앗고,
네 자유를 위해
내 자유를 잃어야 한다.
강물처럼 흐르는 자유와
불길처럼 타오르는 자유가,
에서와 야곱 같은
쌍둥이 화산인 것을...
국민학교 소년 시절, 해방이란 낯선 단어에 어른들과 함께 덩달아 춤을 추며 기뻐했다. 한편 자유라는 쓰나미에 휩쓸렸다. 자유에 목이 탔던 군중 들이 난장판을 이루었다. 앞 산 벚나무들이 일본 국화라며 모조리 도끼에 찍혀 장작 더미로 변했다. 자칭 애국자들이 흔드는 자유의 깃발로 그야말로 天地開闢(천지개벽)이 된 것이다. 이윽고 信託統治(신탁통치)와 單獨(단독) 정부 수립의 贊反(찬반)으로, 자유의 廣場(광장)은 좌․우익의 돌팔매질 싸움터로 변했다. 우리 국민학교에도 이 불똥이 튕겼다. 공부는 뒷전이고 비방과 욕설, 주먹 다짐으로 교실은 쑥대밭이었다. 모두가 자유라는 이름의 무법천지였다.
麗․順(여․순)사건의 餘震(여진)인 火魔(화마)는 우리집을 焦土化(초토화) 시켰다. 이어지는 同族相殘(동족상잔)의 6.25전쟁은 우리 가족들을 생명의 백척간두(百尺竿頭)로 몰아 세웠다. 罪囚(죄수)가 아닌데 監獄(감옥)에, 捕虜(포로)가 아닌데 收容所(수용소)에, 人質(인질)이 아닌데 海賊船(해적선)에 갇힌 신세가 되어 자유가 곧 생명임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4.19,5.16,6.10, 10.26, 5.18... 이 亂數表(난수표) 같은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청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정신적 恐慌(공황)에 빠졌다. 이 무렵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페트릭 헨리의 외침이 가슴을 설레게 했다.
과연 자유란 무엇인가? 법관이라는 靑雲(청운)의 꿈을 꾸며 ‘자유’라는 개념 을 穿鑿(천착)했다. 참다운 자유, 참다운 정의, 참다운 평화가 있는 이상향(理想鄕)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이 꿈이 한낱 무지개요, 이 이상이 신기류(蜃氣樓)로 사라진 현실 앞에 참으로 空虛(공허)했다. 두 눈을 부릅뜨고 현실을 뚫 어지게 바라보았다. 耳懸鈴鼻懸鈴(이현령비현령)이 자유라는 것인가? 젊었을 적 에는 모두 자유를 외치다가도, 늙으면 모든 것이 운명이었다고 인정하게 된 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을 곰씹어보았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 때부터 자유는 죄와 죽음이 아니었던가? 벌이 자 유의 침을 쏘는 순간 죽음에 이르는 것처럼. 내 자유를 지키기 위해 네 자유를 蹂躪(유린)하고, 네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 내 자유를 抛棄(포기)해야 하는 이율배반(二律背反)을 바라보는 陣痛(진통) 끝에 나온 시. 빠삐용처럼 자유를 위해 계속 탈출하다가, 마침내 도피성(逃避城)으로 찾아 들었다. 예수! 그 안에서만이 참 자유인 것을.... 현실도피(現實逃避)가 아니냐는 비아냥이 있겠지. 하지만 여기서 비로소 참 자유의 노래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