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치리공 Oct 23. 2015

설소대를 만지며

1. "엄마한테 그런 거 아냐. 신경쓰지마." 교회 성가대 지휘자 선생님 막내딸이 한 말이다. 20개월인데 말을 이렇게 잘 하냐고 물으니 다 비슷하다고 한다. 아 그렇구나. 


2. 나는 4살 되기 직전에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하게 늦게 한거다. 부모님은 내가 벙어리인 줄 알았다고 했다. 다른 아가들은 사물을 보면 구체적 표현까지 할 시기에, 나는 그저 어버버버 하고 있으니  얼마나 속이 타들어갔을까. 부모님은 전국 팔도 말 못하는 어린이 치료를 잘한다는 병원이 있는 곳엔 다 찾아 다녔다.  


3. 나를 안고 한참을 방황하던 부모님은 대구까지 갔다. 그곳의 의사는 나의 설소대(혀 밑과 입 안을 연결하는 것)가 너무 긴 것을 주요 원인으로 보았다. 바로 수술을 했다. 다행히 설소대 수술이 부모님의 병원투어 종착역이었다. 그 후로 조금씩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후 부모님의 지속적인 사랑과 기도 덕분에 지금은 말이 너무 많아서 문제인 성인이 되었다. 


4. 말은 잘 하고 다니지만 또래보다 늦는 건 여전하다. 청년실업은 50만명의 이야기고 나는 50만 1번째 청년인줄 알았다. 하지만 나의 모든 이력서는 높은 경쟁률을 만드는 데만 사용되었다. 페이스북에는 좋은 데 취직한 친구들의 소식이 하나씩 올라온다. 꿈을 쫓아 열심히 사는 듯한 근황을 전한다. 뜨거운 열정으로 타임라인이 뜨겁다. 그들의 안정적인 삶과 성장하는 모습에 열등감을 느낀다. 

5.  "뭐하고 사냐"라는 가벼운 질문이 이렇게 무거웠던 적이 없다. 나도 내가 뭐 하고 사는지 잘 모르겠다. 분명 뭘 하긴 하는 것 같은데 결과물이 없어서 할 말이 없다. 괜히 심술이 난다. 궁금하지도 않으면서도 묻고 지랄이야. 이내 다시 나의 쪼잔함에 한숨이 나온다. 다들 열심히 달리는데 나는 쳇바퀴 위에서 달리는 것만 같다. 


6. 이런 자괴감이 밀려 올 때마다 혀끝으로 설소대를 잘라 낸 부분을 눌러본다. 남들보다 몇 년이나 뒤쳐져 벙어리인 줄 알았던 내가 그래도 지금은 아무렇지 않구나. 그 시절 자식 걱정에 밤샜을 부모님과 말을 못해 답답한 어린 나를 생각하면 마음 한켠이 아린다. 그저 시작이 늦을 뿐인데, 남들이야 어쨌든 나의 때가 있는 건데.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 부모님을 만나 "전 너무 말이 많아서 시끄러운 청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마세요. 껄껄" 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7. 말 걱정하던 시절을 지나 일 걱정하는 시기가 되었다. 여전히 나는 늦다. 이런 불안은 늘 삶을 물고 늘어진다. 그럴 때마다 혀끝으로 설소대 수술 부위를 누르며 생각한다. 늦는 거 처음도 아니잖어. 사람마다 때가 있지. 남이사 어떻든 나는 나대로 잘 살아야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