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산
인구가 20여 만 명 정도 되는 중소도시의 어느 공터에도 서커스의 천막이 서던 시절이 있었고 그 시절은 지금으로부터도 아주 먼 옛날은 아닌 듯, 기억을 더듬어 보면 밀레니엄의 환상과 기대가 부풀어 오를 때도 서커스는 전국의 곳곳을 돌고 있었기에 티브이의 신파성 다큐에서도 그 천막 안의 주인공들은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다른 차원의 인생으로 소비되어, 회사 다니고 장사하며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다수 사람들에게 관음증스런 상대적 안온함을 제공해 왔던 것인데 언제부터 이런 류의 서커스단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는지 발전하는 다채로운 종류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사람들의 관심이 서서히 쏠리는 사이에 서커스는 우리의 곁에서 사라져 버렸다.
서커스의 천막이 서고 깃발이 걸리고 어디선가 간간이 나팔소리가 들려오고 난쟁이들이 왔다 갔다 바람을 잡으면 시내엔 으레 구석구석에 이미 서커스 상륙 전단과 포스터가 눈에 띄고 원숭이처럼 날랜 사람들이 공중에서 자전거도 타고 재주도 넘으며 손이라도 놓치면 어쩌나 불안불안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공중곡예도 펼치는 요지경 세상이 그 안에 있다는 소문이 왁자하게 퍼지는데 아이들 사이에선 누가 누가 천막 옆쪽 개구멍으로 몰래 들어가 공짜 구경을 했다는 말이 돌고 덩달아 주변에 줄줄이 딸려오는 야바위, 약장사, 칼장사, 엿장수 등등이 호객하느라 떠드는 말맛에 흥성흥성 분위기가 들뜨게 될 때, 나는 아버지를 졸라 그 천막 안의 초라한 무대 앞쪽에 앉아서 나보다 키 작은 어릿광대의 얼굴에 주름이 많았던 것과 레이스가 뜯어진 원색의 원피스와 빛이 바랜 타이즈를 입고 나무통을 굴리던 여인들의 노동에 어디로부터 오는지 모를 슬픔을 느꼈다.
"난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아. 사람들이란 저마다 있는 힘을 다해서 살아간다는 거야. 못난 놈도 제 딴에는 자기가 가진 거 남김없이 다 털어서 살고 있다는 걸 이제야 알겠어. 그래...... 이 세상 써커스 바닥이나 똑같아. 손님이 따로 없다 뿐이지 분 바르고 옷 갈아입고 재주피며 살기는 마찬가지란 생각이야."
한수산 작가의 '부초'는 1977년에 발표된 소설로 서커스단과 그 단원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내 기억에서 그리고 또 내 마음에서도 희미하게 잊혀가던 유년의 기억들을 건져 올려 주었고 이 소설을 통하여 그 시절의 현대화에 대한 거부감이나 현재 우리가 당면한 초고도기술에 대한 두려움이나 궤를 같이한다는 것, 소양강의 수달이 소양강의 물을 다 마실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은 본인의 협소한 한 생을 살아갈 뿐 타인의 한 생을 잠깐 엿볼 수 있을 뿐 감히 짐작하고 재단할 수 없다는 것, 시간이 지나며 점점 짧게 여겨지는 십 년이라는 단위, 그 몇 배쯤 지난 길지 않은 세월에 그동안 잊힌 단어와 정서를 다시 볼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고마움과 따뜻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