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휴대폰의 벨소리를 건즈앤로지즈 November rain의 기타 솔로로 설정해 놓은 것은 2000년의 겨울이 오기 전이었다
제대하고 등록금을 번다고 왔다 갔다 하던 시절이었다.
그 멜로디를 알아봐 주었으면 하는 사람은 한 둘 있었는데 그녀들이 아는 척을 해 옴과 동시에 해 줄 말들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ㅡ어! 이 노래 알아요? 16화음 벨소리로 들으면 훨씬 좋을 텐데... 휴대폰이 별로라... '띠리리리' 이런 음은 좀 안 어울리긴 하죠?
ㅡ11월이 되면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이 노래는 꼭 틀어주는 거 아세요? 사실, 안 틀어줄 수가 없겠죠. 11월에 이 노래는.
ㅡ이 뮤직비디오 보셨어요? 그 웨딩 장면이랑 슬래쉬가 교회 앞에서 기타 솔로 연주할 때는 진짜!
이 정도의 대답들이 빽빽하게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32화음 휴대폰이 출시될 때 까지도 이 벨소리를 알아봐 주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 무심한 하루가 그냥저냥 지나가고 있는 날,
" 어! 이거 November rain 아니야?" 자부심과 호기심이 섞인 눈빛을 던져온 건 내 눈에는 좀 시시껄렁해 보이던 나보다 한 두 살 많은 형이었다. 즉, 남자 사람이었다.
그래도 나는 내 대답의 리스트에 맞춰서 모두 말해주었다. 이것이야 말로 상상 연습의 현현이었다고나 할까.
다양한 경우의 수에 대한 모든 대답이 막힘없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게 무슨 소용, 무슨 의미가 있나......'
적당히 찬 공기를 쐰다든가 냉수마찰까진 아니라도 등목이라도 한다든가 가을바람 불어오든가 갑자기 퍼뜩 잊은 물건이라도 떠오르면 뇌는 바짝 긴장하는 것 같다.
램의 속도가 붙는다고 말하면 비슷할지 모르겠는데 여하튼 처리 속도가 빨라지면서 큰 오류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청춘의 열기들이 모여 앉은 술집에선 저마다 소리 높여 최신곡을 흥얼거리고 유행어를 남발하고 시기 없는 질투와 순백의 애정과 엇갈린 사랑의 작대기가 있어서 열등감을 감추거나 우월함을 가장하거나 누구를 끌어다가 우스개로 만들거나 하는 일들이 으레 벌어지는 것이다.
그 안에 같이 있으면 술이 계속 도는데 괜스레 한 잔도 빼지 않고 마시고 싶어서 꾸역꾸역 받아마신다.
그때는 아직 소주의 쓴 맛이 싫을 때였지만 '캬'소리도 내가면서 멋있는 척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보면 무시로 젓가락을 떨어뜨리고 접시에 안주 하나를 놓고도 다시 하나를 집어오고 무슨 꼭 하고 싶은 말도 아닌 말을 하는데도 자음과 모음이 엉키기 시작한다.
뇌의 주름이 쌩쌩하게 잡혀있던 시절이었기에 큰 말썽 없이 견뎠지만 술에 장사 없다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어서 몇 명이 시작한 자리에 서넛이 남고 다시 두셋이 남을 때까지 그렇게 있다 보면 막차도 끊기고 속은 메슥거리고 집에는 걸어갈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눈빛이 흐려진 만큼 뇌도 슬슬 풀어지면서 몸과 뇌 모두 슬라임처럼 변한다.
곤죽이 되어 가는 것이다
그래도 그 형은 시종일관 Rock spirit에 대한 예찬을 끊임없이 늘어놓았고 본인도 음악 좀 들었다면 들었는데 아직 November rain 기타 솔로를 벨소리로 설정해 놓은 사람은 처음이라는 둥, 슬쩍슬쩍 물어보는 말에도 모두 대답을 했다는 둥, 마지막 질문은 사실 난도가 높은 거였는데도 대답하는 걸 보고 이 정도면 Rock spirit의 동지로 인정한다나 뭐라나 그런 말들을 해댔다.
그 자리엔 여자애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정도로 잘 알진 않는다고 부정하지 않았고 여자 사람들도 그의 말에 맞추어 오! 와! 해주면서 장단을 맞춰주었던 것이다.
어떻게 하다가 둘이 남게 되었나
그걸 모르겠다. 뇌는 이미 슬라임 수준이었으니까.
그때는 표현할 수 없는 종류의 호감 만이 남았던 것이었나.
말이 많던 그 형은 참 심플하게 말 만 많아서 1차에서는 꼭 필요한 사람이고 2차에서는 가도 그만인 사람이고 3차쯤 되면 다들 눈짓 손짓을 하고서 따로 흩어지던 것인데 그날 나는 그녀와 어떤 눈짓 어떤 손짓 없이 고스란히 둘 만 남게 되었다. 그녀와 둘이 걷게 된 것이다.
ㅡ조동진 알아요? 난 rock은 잘 몰라요.
ㅡ잘 몰라요
ㅡ시인과 촌장 알아요?
ㅡ잘 몰라요
이러다간 오늘 이제껏 음악적으로 높아진 나의 평판이 쉬이 들통날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뭔가 빨리 한 마디는 해야 했다.
ㅡ저 윤상은 좋아해요.
찬바람은 슬라임 상태의 뇌에 다시 생기를 주었나 보다.
ㅡ아! 윤상 좋죠! 윤상 아주 좋죠!!
그 대화의 영향이었겠지. 우리는 뮤직비디오를 틀어주는, 카페와 술집을 겸한 어떤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스크린이 앞쪽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란히 앉게 되었는데 맥주를 한 세병정도 주문했던 거 같고 내 기억에 그 맥주는 밀러 아니면 버드였을 것이다.
그때는 외국에서 온 맥주란 내가 아는 한국에는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내가 몸담았던 곳, 직장인 듯 아르바이트인 듯 한 그곳엔 청춘 남녀들이 모여있고 뭔가 되게 업무 협조 같은 것을 하는 마냥 청소 당번도 바꿔줘야 하고 탕비실에 스낵과 커피가 떨어져 간다고 하고 오늘 왜 지각인지 갑자기 아픈 이유가 무엇인지 변명도 해줘야 하고 해서 어느 정도의 번호들이 모여있었다.
그녀의 휴대폰 번호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번호는 그녀가 어느 팬시점에 들러서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간 김에 새 해 수첩 하나 사다 달라고 부탁하면서 이미 저장된 것이었다. 그 수첩은 사실 내겐 별 필요 없는 것이었지만.
나란히 앉으니 좋았다. 그녀의 온기가 느껴져서라기보다는 얘깃거리가 많지 않은 남녀는 마주 앉는 것보다는 나란히 앉는 게 좋았다는 것이다.
스크린을 보다가 글라스에 담긴 황금색 맥주를 바라보다가 손에 쥔 휴대폰을 보다가 내 시선은 그렇게 방황했겠지.
ㅡ휴대폰에 뭐 보는 거예요?
무슨 용기로 꼭꼭 눌렀을까. 천지인 입력방식의 한글 자판을 나는 꼭꼭 눌렀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리고 그녀에게 send.
손현주라는 탤런트가 어깨뽕이 넓은 양복을 입고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하면서 부르던 반쯤 트롯 같은 노래 제목이었다.
그녀를 보니 그 말이 떠올랐다. 정말 그랬으니까. 보고 있어도 계속 보고 싶었다. 다시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녀가 활짝 웃어주었다.
실내는 따뜻했다. 따뜻함이 온몸을 감싸왔다.
워낙 포근했던 그날의 패브릭 소파의 오렌지색 감촉은 지금껏 남아있다. 냉기에 눌려 어디쯤 몰려있던 알코올들이 다시 뇌로 돌아온다.
흐릿해지고 몽롱해진다.
나는 그녀의 오른쪽에 앉아있었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것을 기억한다.
하얬다. 예뻤고.
동공이 보이지 않던 전체가 까맣던 눈동자는 오닉스처럼 순수한 블랙으로, 반짝하는 초승달 같은 윤기에 싸여있었다.
그녀를 보았고 입 맞추었다.
망설임이 없었다. 더할 나위 없는 자연스러움, 나에겐 그때까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자유로움이었다.
그것은 아무런 의심도 걸림도 없는 N극과 S극이 서로 당기는 자력과 같은 것이었다.
이대로 살큼 잠이 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잠이 들었던 건가..
11월을 훨씬 지난 바람이 무척 차가웠던 어느 겨울밤이었다.
에스페로를 타던 그녀의 남자친구는 그녀를 데리러 자주 찾아왔다. 그녀는 그와의 이별을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녀는 나를 좋아하게 되었으니까. 소소히 쌓였던 잘못이 죄보다 큰 형벌로 그 남자에게 닥쳤을 것이다.
대부분의 환승은 이런 불공정을 남기겠지.
그녀의 얼굴이 잊혀 가는 지금도 날렵하던 흰색 에스페로의 후미등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그 차에 오르던 그녀의 뒷모습도.
더 좋은 차가 아니라도 내가 더 멋지게 운전할 수 있다고 혼잣말을 했다. 근거없이 하는 말은 아니니까.
그 무렵이었나. 이제 곧 여자친구가 될 그녀와 바다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스물서넛 나이에 운전을 한다는 것은 그 시절에 흔치 않았다.
운전은 나의 영역, 지프는 내 전공이었다.
'닦고 조이고 기름 치자'라는 글씨가 고딕체로 똑바로 쓰인 수송부의 시멘트 정비고에서 2년여를 보냈다.
순서가 그리되어서 그랬는지 운이 좋았던 것인지 나는 대대 2호차를 받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수송 주특기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열망하던 지프차였던 것이다.
나는 그 차의 바퀴를 수십 번 뺐다 끼웠고 풀 수 있는 너트는 다 풀었다가 조립해 보았고 손에 이런저런 오일들을 묻혀가며 정비해 보았다.
훈련 파견을 나갔던 철원의 어느 부대에서 남쪽의 사람들보다 그 해의 첫눈을 제일 먼저 보며 감상에 젖어들 때 실외 스피커에서 나오던 그 안내방송.
"지금 눈이 오니 각 부대 운전병들은 신속히 체인을 칠 수 있도록, 다시 한번 전달한다. 각 부대 운전병들은 담당 차량에 신속히 체인을 칠 수 있도록."
채 20분도 지속할 수 없었던 그 해 첫눈의 센티멘탈,
나는 어줍은 손으로 지프의 네 바퀴에 모두 체인을 쳤었다.
손을 호호 불어가면서.
울타리 안에만 갇혀 지내야 하기에 괴로운 것이 바로 군인이다. 그런 상황에서 지프를 운전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부러움을 샀다.
동행한 간부들 몰래 슈퍼마켓에서 캔맥주 같은걸 사서 이별 통보를 받은 후임병에게 갖다 줄 수도 있었다.
청소 막 끝낸 잠깐의 시간에 막사 뒤쪽 어디 으슥한 곳에서 원샷을 명령한 후, 감사하다는 말을 들으며 청량감에 슬픔을 씻어내리는 눈물을 볼 수 있었다.
훈련 중에는 문짝과 천정을 다 뜯어내어 오픈카를 만들어 차량 행렬의 선두에 서거나 4륜 구동을 넣고 가파른 산과 물이 제법 잠기는 개울도 야생마처럼 누볐고 시골의 어떤 완만한 고갯마루를 내려올 때면 슬로프를 활강하는 스키어처럼, 자유로운 솔개처럼 날아다녔다.
보통 우리나라의 날씨는 오픈카를 몰기엔 부적절하지만 어느 하루, 비 온 뒤 맑은 먼지 없는 청량한 날에 오픈카를 타 본 이는 알게 된다. 비 오고 춥고 덥고 먼지 날리던 그 괴로움이 모두 잊힐 정도로 완벽히 황홀하다.
갓 제대한 놈들은 하나 같이 이런 얘기들로 가득 차 있어서 각자의 옆에 붙어있는 여자친구들은 쉽게 지치기 마련이다.
여자친구가 된 나의 그녀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래도 싫은 내색 없이 들어주었고 나는 선탑자를 쉽게 잠재우던 부드러운 운전실력을 뽐내며 그녀와 드라이브하고 싶었다.
바다를 가고 싶었다. 태백산맥을 넘고 싶었다. 강릉을 가고 싶었다.
고2를 앞둔 겨울방학의 어느 날 친구와 밤기차를 타고 강릉을 간 날이 있었다. 꼭꼭 눌러 기다린 약속의 날이었다.
원주에서 밤 11시쯤 기차를 탄 거 같고 드라마 때문에 엄청 유명해졌다가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는 정동진역을 지날 때는 겨울 바다를 볼 수 있었으니까 적어도 8시간 이상의 여정이었다.
밤기차는 하루를 힘들게 보낸 사람들이 타는 기차이지 어설픈 낭만으로 타는 기차가 아니다.
상상했던 모든 것들이 출발 30분 이후에는 상상과 반대로 흘러갔다.
창밖으로 보이는 먼 가로등과 달 빛을 받아 숨 고르기에 들어간 산등성이와 그 아래 엎드린 포근한 마을들, 그리고 그 마을의 몇몇 집에 밝힌 전등 불빛, 그런 것을들 상상했다.
그러나 기차가 도시를 빠져나가면 창이 보여주는 것은 거의 완벽한 어둠뿐이고 간신히 창밖으로 무언가 보인다 싶어도
그건 반사되는 기차의 실내등으로 인해 온전한 감상을 전해주지 못했다.
진로에 대해서 학교에 대해서 그리고 막연한 마래의 연애에 대해서 끝도 없는 얘기를 나눌 것 같던 친구도 어느덧 잠이 들었는지 나는 워크맨에 카세트테이프를 갈아 끼우면서 기대에 부풀었던 가슴이 다시 고독함으로 시들어 가는 것을 맛보아야 했다.
강릉역에 아침에 도착한 기차에서 우리는 짐짝처럼 부려졌다. 도착의 기쁨보다 잠에서 덜 깬, 잠이 모자란 피곤함이 덮쳐왔고 우리는 각자 뻗친 머리칼을 해가지고 경포대의 백사장에 터벅터벅 나섰던 것이었다.
갈매기는 날았고 파도는 살짝 거칠었고 파란 하늘은 없었고 찌뿌드드 흐린 날이었다. 바다를 보았으나 그리던 바다가 아니었다.
그녀와 같이 떠났던 바다는 어떠했나.
멋진 지프는 없었다.
아버지의 그레이스 화물봉고차를 끌고 나섰을 때, 그녀를 태웠을 때 가분수 같은 그 차에서도 어떤 음악은
흘러나왔었다. 그녀는 마냥 설레는 표정이었지만 출발할 때부터 나는 내가 정상이 아님을 알았다.
어딘가 배배 꼬인 심술 같은 것이 나의 일부를 적시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실체를 알 수 없었다.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일까
영동 고속도로를 넘으며 대관령의 너른 목장에 젖소들이 그림같이 흩어져있어도 도무지 신나지 않았고 강릉 쪽으로
향하는 내리막길, 날개를 편 솔개처럼 바람을 안고 싶었던 마음은 옹졸함으로 갈무리되었다.
나는 알아챘다.
그레이스를 앞지르는 하얀색 에스페로를 보고 알았다. 그것은 나의 열등감과 같은 색깔이었다.
'저 미끈한 차의 조수석에 앉아 예쁜 카페, 맛있는 식당 어쩌면 전국을 누비며 안 가본 곳 없이 즐거웠을 사람'
오른쪽으로 슬몃 바라본 그녀의 옆얼굴 라인이 얄밉게 변해있었다.
그렇게 무거운 분위기를 전파하고 있었다. 간디를 모르던 만큼 연애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난 비폭력 비협조의 답답함을 주입하고 있었다.
그녀가 뭔가 다시 잃을지 모른다는 예감의 표정을 애써 지우던 그 순간도 나는 역시 외면하였던 것이다.
바다를 보면 뭔가 뻥 뚫릴 거 같았지만 고등학교때와 마찬가지로 역시 바다는 생각처럼 오래 볼 수 없었고
그것은 나의 상념과 당면한 사소한 것들이 바다를 담을 만한 여백을 마련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사람의 마음은 바다를 담기엔 역시 좁다는 성급한 일반화를 경포 해변에 남긴 채 다시 봉고차를 차고 나의 도시로 돌아왔다.
중앙시장 통로의 좌판이 걷힌다.
순대를 썰어 팔던 좌판도, 메밀 전병을 부치던 좌판도 칼국수를 팔던 좌판도 걷힌다. 그래도 시장 모서리 건물의 한 칸 씩들을 차지하고 있던 점포들은 굳건히 은은한 불빛을 내 비치고 있었다.
초록색 셀로판테이프가 붙어있던 알루미늄 여닫이문을 그녀와 함께 열고 들어가니 14인치 테레비를 보고 있던 초로의 여인이 반겨준다. 그 웃음과 다르게 눈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던 것을 기억한다.
아직 솜털이 뽀얀 청춘들이 올 곳은 아니라는 의아함이었을 것이나 아주머니는 어서들 오라면서 자리를 지정해 주었는데 그즈음은 신용카드라는 것이 스물 초반의 아이들에게도 마냥 발급되던 무렵이었다.
그냥 삼겹살집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곳엔 부챗살 치마살 갈빗살 등등의 메뉴판이 붙어있었고 나는 그게 돈육의 한 부위인 줄만 알았다.
복학을 하고 그 알바는 그만두었다.
거기서 직업으로써 계속 일하던 친구들을 위해서 그 직장을 그만두었다고 정정하고 싶다.
그녀는 여전히 일하고 있었고 C팀의 누가 판매를 잘해서 인센티브를 월 70만 원씩 더 받는다는 이야기며 누구랑 누가 사귀고 누구는 술만 마시면 실수를 해서 이제는 여자들 사이에서 왕따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때 나의 마음은 일견 에버랜드와 다름 없던 캠퍼스의 교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리포트와 전공과 토익과 제2외국어와 교직원 식당의 밥이 천 원 비싸지만 훨씬 맛있다는 그런 것들 속에 있었던 것이다.
현명한 그녀는 바람이 센 어느 날, 멀리 날린 연의 연줄이 느슨해지는 감각처럼 그녀의 손으로 나를 당길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때 식당에서 나는 그녀를 만나는 동안 가장 비싼 금액을 결제했다.
집에서 부쳐오는 돈으로 생활하던 나는 그녀에게 무던히도 얻어먹고 신세 졌다. 그녀가 값을 치를 때 마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사내가 되어 혼난 아이처럼 빙빙 돌았었다.
그날 93,000원을 결제하고 나오면서 나는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하루 일과가 매너리즘 같은 날이었다.
한 잔 하고 싶은 생각이 나서 대뜸 번호를 누른다.
삼십 년쯤 알다 보니 이제는 후배라기보다는 친구다.
나와 후배 사이엔 관성처럼 반말과 거기에 대응하는 약간의 존대가 교차한다.
"어 오늘 맞지?"
"아! 그런가요"
"에이 오늘 맞지. 보름 지나고 날 좋을 때 보자고 했잖아. 오늘 날 좋잖아."
아무 말이나 던져보는 것이다.
"아 맞네, 오늘이네요"
잘 받아준다.
"어디로 가자고 그랬었지? 지난번에 생맥 한잔 먹자 그랬었나, 여하튼 니가 알아서 장소 찍어봐."
통하면 결속력이 다져지는 상쾌한, 그러나 수신자가 선약이 있으면 김 빠지는 이런 농담투의 전화는 몇 년 전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후배는 동네에 신청곡을 받아주는 맥주집이 있다고 했다.
그 집에 들어서니 조빔의 보사노바가 흐르고 있다. '저런 박자에 우울함을 섞는 것도 재주'라는 생각을 하면서 자리를 잡았다. 500cc잔을 두 개쯤 비우고 페이퍼에 무얼 적을까 생각하다가 어떤 배치가 데자뷔를 긁어 일으켰는지 진짜 오랜만에 그 노래, 길기도 한 그 노래 November rain을 적었다.
b와 v의 배치를 신경쓰면서.
뭘까 이런 식의 어깃장은.
올드팝과 뉴에이지, 가끔 재즈의 선율이 울리는 조용한 분위기에 갑자기 노벰버레인 이라니.
생뚱맞은 선곡에도 주인은 태연히 유튜브를 링크해 주었다. '조회수는 이제 몇 억쯤 되지 않았을까...'
왜 그때 내게 문득 스쳤을까. 그 옛날의 향수가.
피아노로 시작해서 일렉기타로 드럼과 베이스가 들어오고 키보드와 합쳐져 고조되는 부분에서 음들이 뭉치기 시작하면서 둔해지는 느낌이다. 기타 솔로는 흘러가지만 풀어진 음들 속에서 리드미컬함을 잃어버렸다.
이제는 어떨 때 꿈에서 밖에 안 떠오르는 윤곽, 초롱했던 눈빛도 되바라진 앙칼짐도 아낌없던 헌신도 체념뒤의 격려도 모두 뭉쳤다가 흐물흐물 해지고 말았다.
ㅡ탄노이는 락을 좀 안 받아줘서요.
Great Britain 고귀한 족속들은 디스토션을 싫어하는 것인지 주인의 한마디에 슬쩍 짜증이 올라온다.
아델이 위풍도 당당하게 When we were young을 부를 때 그녀의 뒤에 우뚝 서있는 스피커 탄노이.
어설픈 노기가 올라올 때는 요의를 의심해야 한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으며 거울을 본다. 스무 살의 감흥은 남아있지만, 뮤비 속의 슬래쉬는 아직도 격정적이고 수십 년이 지나도 이 노래는 촌스럽지도 않은데 거울 속의 나는 그렇지 않았다.
이 아저씨는 눈빛이 흐리고 게다가 표정이 슬프고 보통의 보통처럼 평범하여 불쌍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배도 부르고 양주는 비싸고 소주는 안주가 없고 오늘은 후배 겸 친구에게 '장소 선정 미흡'이라는 낙제점을 주면서 평소보다 서둘러 일어선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요상하게도 돌아오는 동안 내 머릿속 남은 멜로디는 November rain 이 아니었다.
머리에서 맴도는 건 아델의 영상 속,
When we were young을 받치고 있는 수차례 반복되는 코러스였다.
머릿속을 꽉 채웠던 멜로디는 바로 그것이었다.
when we were young
when we were young
when we were yo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