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장녀의 무게
어릴 적 내 꿈은 비행기를 타는 것이었다. 높이 떠올라 멀리까지 날아가면, 좁은 집과 대출 이야기로 가득한 어른들의 목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답게 단순한 꿈이었지만, 내겐 자유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 꿈은 의외로 빨리 이루어졌다. 형편이 넉넉했던 외가 덕분에, 서울 친척 집을 가기 위해 처음으로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그날의 여운은 꽤 오래 남았다. 비행기 창밖으로 보이는 구름과 햇살은 마치 다른 세상으로 안내하는 문 같았다. 그러나 도착 후 마주한 현실은 내 마음에 또 다른 그림자를 남겼다. 널찍한 거실, 반짝이는 대리석 바닥, 유리창 너머 햇빛을 받아 반짝이던 인형들, 해리포터 시리즈가 가득 꽂힌 책장. 그 모든 것이 내겐 낯설지만 눈부셨다.
집에 돌아오는 길, 좁고 어두운 우리 집의 공기가 더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낡은 벽지와 오래된 장판의 냄새, 가구 사이로 삐져나온 정리 안된 물건들까지... 나는 괜히 움츠러들었고 자연스레 작아졌다. 그때 처음 알았다. 세상은 같은 속도로 달리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집의 실질적인 가장은 엄마였다. 아버지는 프리랜서로 일정치 않은 수입을 벌었고, 집안의 생계는 늘 엄마의 어깨 위에 올려져 있었다. 때론 보험회사에서, 때론 식당일을 하시며 녹초가 되어 돌아와 이불속에서 몰래 울던 엄마의 모습은 어린 내 마음속에 깊이 박힌 가시가 되었다. 이에 반해 친가와 외가 모두 우리 집보다 더 잘 살았기 때문에 친척들의 은근한 비교와 무시는 늘 따라다녔다. 그때마다 엄마는 말했다.
“너는 우리 집 기둥이야. 네가 잘돼서 엄마 한을 풀어줘.”
그 말은 격려가 아니라 무거운 돌덩이였고, 장녀라는 이름표는 무거운 책임과 의무가 되어 내 어깨를 짓눌렀다.
성공해야 한다는 말은 결심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무너져 가는 자존감 앞에서 나는 더 단단히 다짐했다.
“우리 집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았지만 현실은 늘 나를 붙잡았다.
사촌들은 유학을 가고, 넉넉한 집안 덕분에 원하는 길을 마음껏 선택했다. 친구들은 부모님의 인맥으로 손쉽게 직장을 구했다. 반면 나는 늘 무대 뒤에 남겨진 엑스트라 같았다. 성공은커녕 살아남기 위해 버티는 것조차 벅찼고, 비교의 시선 속에서 점점 더 고립되었다.
그래도 내 마음 한편에는 또 다른 꿈이 있었다. 그것은 '글을 쓰는 일'이었다. 학창 시절, 글짓기 대회나 독후감 대회에서 상을 받으며 칭찬을 들을 때마다 ‘나도 언젠가 작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며 작가의 삶을 조심스레 꿈꿨다. 그러나 집안 형편 앞에서 그 꿈은 사치였다. 예술은 가난과 직결된다는 편견도 나를 붙잡았다. 하고 싶은 것보다 ‘안정적인 길’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고, 결국 높이 날고 싶던 어린 시절 꿈은 장녀라는 무게에 묶여 땅으로 가라앉았다.
돌이켜보면 그 무게는 단순한 장녀라는 이름표의 짐만이 아니었다.
가족의 기대와 끊임없는 비교의 시선,
그리고 끝내 펼치지 못한 내 안의 억눌린 꿈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낸 무게였다.
그 무거운 짐을 등에 진 채, 나는 결국 공무원 시험이라는 낯설고 외로운 길,
공시생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것은 곧 실패와 고립,
그리고 뒤처짐의 굴레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