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만으로는 닿지 않는 자리 앞에서
야근은 내 자리였고, 승진은 남의 자리였다.
이 단순한 문장이 내 직장생활의 모든 요약이었다.
오늘도 너랑 나만 남았네,
내 야근 메이트야. 파이팅!”
오늘도 또 야근이다. 나와 함께 늘 야근하던 주사님의 농담이, 이제는 위로보다는 허무하게 들릴 때가 있다.
야근은 밥 먹듯이 했지만, 승진은 여전히 남의 자리였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 보면, 남편의 승진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아내들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남편 상사의 집까지 찾아가 김장을 돕고, 각종 심부름과 잡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자존심 따윈 내려놓은 채 버티는 그들의 모습이 예전엔 이해되지 않았다.
'승진이 그렇게 중요한가? 자존심도 버리고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땐 몰랐다. 남들이 승진하고,
나만 그 자리에 머물렀을 때 찾아오는 그 묘한 고립감과,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분을..
사실 승진에 대한 기대는 크지 않았다. 승진에 대한 욕심도 별로 없었고, 승진 순위도 낮아서 승진은 아직 내 차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라는 말처럼, 책임이 많아지는 건 부담스럽기도 했다.
또한 술자리에 나가고 아부하는 것보다는 실력을 믿었고, 묵묵히 맡은 일을 해내면 언젠가는 인정받을 거라 믿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세상은 늘 성실한 사람에게만 미소 짓지 않았다.
인사이동이 있던 날, 사무실 컴퓨터 화면에는 부서 이동자 명단과 함께 승진자 명단이 동시에 떴다.
나는 떨리는 손끝으로 스크롤을 내리며 내 이름을 찾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오히려 나보다 늦게 들어온 나이 어린 동기가 먼저 승진했다.
평소 팀장님과 농담을 주고받던 그 동기, 그의 웃음소리가 그날따라 유난히 크게 들렸다.
서로 박수를 치며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는 순간, 나는 얼어붙은 그림자처럼 굳어버렸고 서류 더미 속 투명인간이 되어 버렸다.
누군가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싫었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내 존재가 초라해 보였다.
비참했던 건, 우리 부서 동기들 중 나만 승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같은 시간을 버텼고, 더 많은 일을 감당했지만 승진의 자리는 결국 상사의 눈에 든 동료의 몫이었다.
그 순간 현실은 유난히 선명했고, 나는 참 서글펐다.
그렇게 누군가의 이름이 빛나는 시간에, 내 시간은 제자리에 멈춰버렸다.
이름 하나 없을 뿐인데, 마치 세상이 내 자리를 지워버린 듯했다.
나는 일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옮기는 부서마다 새로운 일이 쏟아졌지만, '그러면서 많이 배우는 거지’ 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결국 남은 건 과중한 업무와 피로뿐이었다. 승진에서 낙오된 그날 이후, 내 안의 무언가는 꺼져버렸다.
직장은 조용한 전쟁터였다. 먼저 올라서지 않으면 뒤처지고, 뒤처진 사람은 서서히 잊히는 구조였다.
나는 그 속에서 총을 잃은 병사처럼 서 있었다. 싸울 의지는 남았지만, 쏠 탄환이 없었다.
열심히 해도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라나는 미묘한 열등감....
승진은 단순히 ‘직급의 상승’이 아니라 존재의 확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확인의 순간은
언제나 나를 비껴갔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펑펑 울었다. 그 눈물 속엔 일에서 밀린 자의 외로움, 인정받지 못한 자의 고립이 뒤섞여 있었다. 그 외로움은 비단 직장에만 머물지 않았다.
일에서 뒤처진 나는, 사람 사이에서도 점점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물론 나도 안다.
내가 완벽하지 않았다는 걸,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는 걸...
그리고 성실만으로는 다 이룰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도..
그래서 더 복잡했다.
남을 탓할 수도, 나만 탓할 수도 없는 마음 —
그 애매한 회색지대 속에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사람, 그게 지금의 나였다.
그리고 그 순간, 동시에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지금도 누군가는 사랑을 하고,
누군가는 결혼을 준비했다.
그 속에서 나는 여전히 일과 집을 오가는 무명 배우였다.
하지만 비록 고립된 현실일지라도, 시간은 여전히 흘러갔다. 멈춰버린 듯한 일상 속에서 나는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고립의 무게가 더해질수록, 누군가와 진심을 나누고 싶은 마음의 온기가 다시 깨어났다.
그리고 그 마음은, 오래 잊고 지냈던 설렘으로 변했다.
그렇게 시작된 건 내 안의 세계를 조금씩 깨뜨리게 된 일이 생겼다.
이 글은 「뒤처진 자리에도 레드카펫은 깔린다」 연재의 일부입니다.
시스템 문제로 일부 글이 브런치북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같은 시간의 기록 안에 있습니다.
✈️ [프롤로그] https://brunch.co.kr/@721b65ec84434ef/18
✈️ [뒤처진 자리에서] https://brunch.co.kr/@721b65ec84434ef/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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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은 매일 한 편씩 씁니다.
늦어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오늘도 천천히 써 내려갑니다.
- 이후에는 기존처럼 주 2회로 돌아올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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