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처진 자리에서
“누나, 진짜 여기서 진짜 살 수 있겠어?”
그날은 창문 하나 없는 좁디좁은 방, 오래된 벽지에서 풍기는 쾌쾌 묵은 냄새가 가득한 고시원으로 짐을 들여놓던 날이었다. 짐을 들어주러 온 동생의 눈시울은 붉어졌다.
군복무 중에도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무뚝뚝하지만, 의젓해서 늘 든든하게 생각했던 동생이 이었기에 그 눈물은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괜찮다고 웃어넘겼지만, 동생의 그 눈물은 3년의 긴 수험생활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겨울지를 미리 알려주는 예고장 같았다. 또한 그것은 내 청춘이 얼마나 바닥까지 내려왔는지를 그대로 비추는 거울 같았다.
공무원이 되고자 한 이유는 단순히 안정적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업의 이익보다는 나라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대한민국이 더 나아지는 데 작은 힘을 보태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노량진으로 힘찬 발걸음을 옮겼다.
새벽마다 학원에서 줄을 서고, 고시식당에서 밥을 먹고, 스터디를 하며 하루를 쳇바퀴처럼 돌렸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공부법을 바꿔가기도 했다. “지금까지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산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매일 우직하게 나아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실패가 이렇게 오래 내 곁에 머물 줄 몰랐다. 냉혹한 현실의 무게는 내 피와 땀과 눈물의 무게 보다 더 무거웠다. 정부가 공무원 채용을 늘리던 시기라 경쟁자는 많았고, 나는 영어의 벽 앞에서 번번이 주저앉았다. 발버둥 치면서 그 벽을 넘어서려 애썼지만 , 벽은 묵묵히 제자리를 지켰고 답답함은 커져만 갔다.
답답함은 비단 마음뿐만이 아니었다. 나를 둘러싼 환경까지도 첩첩산중이었다.
창문 없는 고시원 방은 계절도, 시간도 알려주지 않았다. 어둡고 삭막한 곳에서 설상가상 방음마저 되지 않아 작은 소리에도 늘 신경이 곤두섰다.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있어도 글자는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고, 불안과 낮아진 자존감만 짙게 깔렸다. 부모님은 대출까지 받아 학원비를 보태주셨고, 부모님의 그러한 믿음과 장녀라는 자리는 내게 더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친척과 지인들은 겉으로는 위로했지만, 속으로는 나를 현실감각 없는 사람이라 조롱하는 듯했다.
자존감 따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여기서 버틸 수 있을까, 아니 내가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과
공존하며 좌절감과 압박감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낭떠러지 끝으로 떠미는 듯했다.
매일같이 책상 앞에 앉아 문제를 풀었지만, 끝은 보이지 않았고 불안은 두꺼운 먼지처럼 쌓여갔다. 시곗바늘은 움직였지만, 내 삶은 제자리에 멈춘 듯했다.
노량진의 공기는 늘 눅눅한 피로가 배어 있었다. 독서실 창문마다 희미하게 빛나던 형광등은, 마치 도시의 별빛처럼 깜박였다. 그 속에서 청춘들은 책장에 고개를 파묻은 채, 오늘도 자신과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 풍경은 묘하게 쓸쓸했다.
누군가는 합격을 향한 희망으로 달렸고, 누군가는 이미 포기했지만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웃음소리는 거의 없었고, 대신 시계 초침 소리와 펜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 공간을 가득 메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노래 제목처럼 '희망은 내게 잠들지 않는 꿈'이었다. 책상에 붙여 높은 메모지를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공부하다가 죽을 수도 있구나.” “나는 IQ 30이다! 무식하게 하자.”
스스로를 다그치는 듯한 글귀는 웃음기조차 없는 독백 같았다. 하지만 그 문장을 보며 나는 하루를 버텼다. 그것은 절망이 아니라, 나를 겨우 일으켜 세우는 마지막 끈이었다.
그러나 메모 중 하나는 조금 달랐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어놓은 성경 구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 16:18)
이 말씀을 붙들면 마음 깊은 곳에서 작은 숨구멍이 열리는 듯했다. ‘여기서 끝나지 않을 거야.’ 그렇게 믿으며 버텼다.
세 번의 불합격. 바닥까지 닿은 청춘...
나는 그 무게를 등에 지고
여전히 노량진의 밤거리를 걸었다.
처음 불합격 했을 땐 담담했다. 두 번째 불합격했을 때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나 세 번째 불합격의 끝에서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제는 버틸 수 없다고, 여기서 떨어지면 나는 루저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 절망 끝에서, 기적처럼 합격자 명단이 있는 내 이름을 발견했다.
손을 떤 채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고,
우리는 20분 넘게 펑펑 울었다.
그 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길고 벅차고 강렬했다.
인생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단숨에 끌어올려진,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으니까..
무엇보다도 열등감과 불안감으로 얼룩져 뒤처져 있던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이룬 성취였다.
합격이라는 단 꿈은 항상 내 곁에 오래 머물 듯 보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했다. 가장 낮아졌을 때 가장 높아진 듯했지만, 합격의 환희는 오래가지 않았다. 오랜 고통 속에서 깎이고 무너진 자존감은 합격증 한 장으로는 회복되지 않았다. '사회'라는 정글은 '공시생의 수험생활'과는 비교할 수 없이 차갑고 냉혹했다. 그 속에서 나는 점점 뒤처져 갔고 지쳐만 갔다. 합격으로 벗어난 줄만 알았던 고립은 새로운 얼굴로 또다시 나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