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세곡 Oct 05. 2023

아내가 보면 안 되는 글

100일의 글쓰기 - 30번째

아내는 내가 스포츠를 즐기지 않아서 좋다고 했다. 더 콕 집어서 말하면 야구 중계를 안 봐서 좋단다. 쉬는 날에 하루 종일 소파에 파묻혀 리모컨을 손에 쥐고 TV의 노예로 살지 않는 남자, 결혼을 결심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라고 말했었다.


  이제 와서 용감하게 고백하자면, 나는 사실 야구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아니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프로야구 보는 것을 좋아했고,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메이저리그에 흠뻑 빠져 살았다. 국내외 각 구단별 주요 선수들의 이름과 성적을 줄줄 외우고 다닐 정도였다.


  내가 야구 보는 것에 흥미를 잃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2003년부터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직후라서 야구 뭐야?? 축구 짱짱!! 하던 시기인 탓도 있었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내가 응원하는 팀의 성적이 박살 나기 시작하더니 밑바닥에서 도무지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666 858 7667은 은행 계좌번호 같지만, 놀랍게도 내가 응원하던 팀이 2003년부터 2012년까지 기록한 순위를 나열한 것이다. 프로 야구를 응원하는 맛에 봐야 하는데 찰지게 욕하는 맛에 보고 있었다. 팀의 성적만큼이나 내 인내심도 함께 바닥을 치고 말았다.


  야구를 보면 볼수록 내 인격은 파탄날 지경이었다. 그 팀의 한국시리즈 마지막 우승은 무려 1994년. 이제는 너무 아득해서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때. 내 평생에 다시 우승을 보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고 결국 나는 팬으로서 은퇴를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늘 믿지 못할 소식을 뉴스를 통해 접했다. 내가 한 때 응원했던 그 팀이, 수많은 세월 애증 속에 살게 했던 바로 그 팀이 프로야구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다는 소식이었다. 그것도 무려 29년 만에 말이다.


  그렇다. 나는 LG트윈스의 팬이다. 오늘에서야 당당히 엘밍아웃 할 수 있게 되었다. 솔직히 고해성사를 하자면, 한때는 너무 창피해서 “저는 LG팬이에요.”라고 말하지 못하고 “이기는 팀 응원해요.”라고 둘러댄 적도 있었다.


  지는 모습이 지긋지긋해 그동안 팬으로서의 본분을 저버린 것을 깊이 반성한다.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팬으로서 잠정적으로 은퇴했던 것일 뿐, 영구 은퇴는 아니었음을 구차하게 변명하는 바이다. 내가 너희를 어찌 버릴 수 있으랴. MBC청룡 때부터 팬이었다. 30년 정도 흐르면 분명 이렇게 정신 차릴 줄 알고 있었다.


  뉴스를 검색하니 댓글에서 다른 구단의 팬임에도 LG의 우승을 축하하는 메시지들이 꽤 많이 보인다. 타 구단 팬들의 응원까지 받고 있는 우리 LG 정말 폼 미쳤다. 앞으로 30년 더 기다릴 자신은 없으니 제발 이대로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가자.


  그나저나 아내 몰래 야구 중계 어떻게 보지?





*사진출처: 네이버 검색 "응답하라 1994 성동일 쌍둥이"

매거진의 이전글 뽕이 가득 차올랐던 그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