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세곡 Oct 04. 2023

뽕이 가득 차올랐던 그때

100일의 글쓰기 - 29번째

나는 삼일절에 전역을 했다. 짤 없이 곧바로 복학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단 하루도 놀지 못하고, 3월 2일 복학해 학교에 갔으니 내 인생 최고의 가성비 시절이었다.


  제대한 지 고작 하루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장점이 되었다. ‘그게 뭐 대단함?’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것은 실로 어마무시한, ‘전투력 만렙’을 찍고 있는 상태라는 말이다. 여기서의 전투력이란 총 쏘는 군인의 전투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갓 제대한 사람에게만 약 6개월 한정으로 부여된다는 일종의 ‘정신력 만렙’을 뜻한다.


  군대에서 온갖 고생을 하면, 제대 후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일종의 열심뽕이 차오르게 된다. 그리고 이 뽕은 정확히 전역하는 날 아침, 위병소를 통과하는 시점에 최고치를 찍게 된다. 세상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근자감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이 열심뽕은 무엇을 하든 능력치를 만렙으로 끌어올려준다. 알바를 하든, 공부를 하든 무서운 집중력과 효율성을 보장한다. 지금은 거의 없지만, 예전에 예비역을 우대했던 것 역시 이것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열심뽕은 영원하지 않은, 일시적인 버프에 가깝다. 전역 후, 하루하루 지날수록 무서운 속도로 감소하게 되어 약 반년 정도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대부분의 남자들이 군대 가면 일시적으로 정신 차렸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전과 똑같아졌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바로 복학을 해버렸으니 이 ‘열심뽕 6개월 이용권’을 오롯이 공부에 쏟아낼 수 있었다. 아니 쏟을 수밖에 없었다. 내 평생 가장 열심히 심지어 고3 때 보다 더 공부에 매진했던 시기였다.


  그중 하이라이트는 기말고사를 대신해 조별로 발표 과제를 준비할 때였다. 우리 조는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복학생이 아니었다. 불안한 기운이 엄습했다. 역시나 그들은 무엇 하나 열심히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주제 선정, 자료 수집, PPT 작성, 발표까지 모두 내가 도맡아야만 했다.


  녀석들은 나를 호구라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나는 그때 초인적인 전투력으로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었다. 발표하기 며칠 전부터는 거울 앞에 서서 연습도 했다. PPT 출력물에는 중간에 칠 농담이나 애드립까지 적어 놓았다. 거의 시나리오에 가까운 내용들을 머릿속에 욱여넣는 동시에 시간까지 재면서 매일을 시뮬레이션했다.


  발표는 준비했던 것만큼 잘 해내지는 못했지만, 나의 피나는 노력을 교수님도 눈치채셨는지 다행히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정말이지 열정, 의욕, 패기 심지어 지금은 꿈도 꿀 수 없는 체력까지 받쳐줘서 뭐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때였다. 


  이런 나의 열심뽕은 한 학기가 지나기 무섭게 흔적도 사라져 버렸다. 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 뒤로는 열심뽕의 그림자조차 내 삶에서 발견된 적이 없다. 군대는 그립지 않지만, 전역 후 열심히 살았던 그 시절은 무척 그리울 때가 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그때, 근거 없는 자신감이어서 실수도 많았지만 어떻게든 해내고야 말았던 그때의 나. 문득 그때가 참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6개월 한정이라도 좋으니 딱 한 번만이라도 다시 와 줄 수는 없을까? 군대라도 다시 가야 하나 싶다. 




*사진출처: Photo by Varun Gaba on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넌 나에게 글감을 줬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