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유해
수험생활에서 해방되어 드디어 자유인이 되었다. 미치도록 하고 싶었지만 공부 때문에 하지 못했던 것들이 오조오억 개 정도 쌓여 있었다. 안구건조증이 걸릴 때까지 영화를 보는 것, 성대결절 직전까지 노래방에서 소리 지르는 것, 이 녀석이 죽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늘어지게 자버리는 것 등등.
미션을 클리어하듯 하나하나 온 정신을 모아 해나가고 있었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 덕분에 내 마음은 대기권을 뚫고 날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늦게 들어온 나를 본 엄마는 대체 직장은 언제 구할 거냐며 소리를 지르셨다.
사자후 같은 엄마의 갈굼은 나를 명중시켰고 고공비행 중이던 내 기분은 그렇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고도가 무섭게 떨어진다. 젠장, 지면이 코 앞이다. 곧 땅바닥에 곤두박질쳐 산산조각 나버릴 것 같았다. 어떻게 되찾은 자유인데, 이렇게 빼앗길 수는 없었다.
다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두 가지 방법 말고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집을 뛰쳐나가 독립해 혼자 살든지, 아니면 엄마한테 일단 GG치고 적당한 직장을 구해 잔소리를 피하는 것뿐이었다.
수년간 공시생으로 살았던 내게 독립자금이 있을 리 없었다. 고민의 여지없이 후자를 택했다. 다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잠시 지금의 자유를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마지막 시험이 끝난 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던 책상을 바라본다. 크게 심호흡을 한 뒤, 그 앞에 앉았다.
목표는 일반 사무직. 이마저도 요구하는 스펙이 후덜덜했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내가 출근할 수 있는 거리라면 무조건 지원했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전화벨이 울린다. 번호가 '010'이 아니고 '02'이다. 사무실 번호가 분명하다. 무척 설레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는다. 망할 또 김미영 팀장이다. 대출광고 전화였다. 결국 내가 지원한 회사들 중 나를 선택해준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구직 기간이 길어지니 자유를 되찾을 수 있는 시간은 점점 멀어져만 갔다. 이러다가는 내 기분이 아예 바닥을 뚫고 내려가 버릴지도 모른다.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급한 대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기로 했다. 알바를 구하기로 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6개월짜리 사무직 알바에 합격했다. 근데 문제가 있었다. 일하게 된 곳이 하필 구청이었다. 계속 공무원 시험에 떨어져서 포기하고 이제 겨우 마음을 잡아가고 있는데 하필 구청이라니. 하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계약서를 작성하고 인수인계를 받으면서 업무를 시작했다. 업무는 생각보다 쉬웠다. 일주일 만에 적응완료. 이제 빌런 스캔만 하면 된다. 이건 더 쉬웠다. 이곳의 우두머리가 바로 빌런이었기 때문이다.
제일 안쪽, 제일 큰 책상에 기대앉아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바로 그 사람. 미친개, 아니 미친 계장 김계장이 빌런이다. 이 사람이 한번 폭주하기 시작하면 그 아래 정규직들은 싹 다 초토화되곤 했다. 사무실은 한겨울 마냥 꽁꽁 얼어붙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이 냉랭한 공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한 명의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나였다. 미친 계장 김계장도 나만큼은 갈구지 않았다. 가끔 나한테 실없는 농담을 건넸을 뿐 아무것도 터치하지 않았다. 6개월짜리 알바인 나는 그의 먹잇감이 아니었다. 그 덕분에 나는 시베리아 사무실에서도 혼자 온실 속의 화초처럼 지낼 수 있었다.
오후 5시 50분. 어김없이 미친 김계장이 등장했다. 우리 엄마의 사자후 정도는 고양이 울음소리로 만들어버리는 포효가 시작된다. 세상에 이런 욕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버라이어티 한 욕들이 쏟아졌고, 직원들의 안색은 곧 흑색이 되어버렸다.
작업하던 파일을 저장하고, 생수통을 갈아 끼운 나는 한참 폭주 중인 미친 계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꼭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계장님, 저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방긋)
정각 6시. 힘차게 몸을 돌려 미소 지으며 사무실을 나선다. 나의 등 뒤로 모든 시선들이 집중된다. 부러움 가득한 직원들의 눈빛 레이저이다. 저녁 6시부터 본격적으로 노예가 되는 그들을 뒤로한 채, 나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 떠난다.
나의 자유는 신기루가 아니다. 오늘의 자유가 시작되는 시간, 늘 하던 대로 편의점에 들러 아몬드 빼빼로를 하나 집어 든다. 당 충전을 하면서 걸어본다. 불어오는 봄바람에 기분이 좋아진다. 다시 하늘 위로 날아올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