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세곡 Apr 27. 2022

알바를 기억해봄 2

알바천국

구청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나서야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급한 마음에 구청 사무직 알바라는 것 외에 다른 내용은 자세하게 읽어 보지도 않고 이력서를 냈던 것이다.  


  내가 지원한 부서는 바로 '대부업' 부서이다. 관내 사채업 허가를 내주고 업체를 관리하는 곳이었다. 한 마디로, '형님'같은 분들이 민원인으로 찾아오고 나는 그분들을 상대하며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차피 관공서이고 그 사람들도 다 사람인데 뭐 겁낼 거 있냐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건 몰라서 하는 말이다. 구청에서 잠깐이라도 일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보통 일반인도 민원인이 되는 순간 전투력이 세 배쯤 상승한다. 그런데 그 민원인이 일반인이 아닌 형님이라면? 그 전투력은 가히 열 배 정도 상승한다고 볼 수 있다.


  이제 겨우 한 군데 합격했는데 죽을 맛이었다. 그것도 공시생 과거를 딛고 구청에서 일하기로 어렵게 마음먹었는데 말이다. 많고 많은 부서 중에 하필 대부업 관련 부서라니. 진짜 미칠 노릇이었다. 출근 전날까지도 제발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달라고 온 맘과 정성을 다해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지원했던 다른 곳에서 혹시 연락이 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아무 곳도 연락을 주지 않았다. 나는 선택해야만 했다. 출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출근을 하면 형님들 사이에서 벌벌 떨며 순교를 각오하고 일을 해야만 한다. 만약 출근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엄마에게 또다시 사자후 같은 잔소리를 들으며 진짜 사자(死者)가 될 때까지 시달려야만 할 것이다.   


  결국, 고민 끝에 열심히 근무하다가 장렬히 전사하는 쪽으로 마음을 먹었다. 채용담당자와 간단히 면담을 한 뒤 일하게 될 자리로 안내를 받았다. 사수인 정규직 직원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 사람 뭐지? 생긴 게 완전 마동석이잖아? 그렇다. 그는 우리 사무실에 있는 모든 직원들 중 가장 덩치가 좋았다. 유도나 레슬링을 한 것이 분명하다.  


  젠장, 대체 왜 날 뽑은 거지? 이종 격투기 선수 출신이나 최소 체대 출신을 뽑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의 덩치를 보고 나니 모든 것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험한 일이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필 많은 사람들 중에 대부업 담당 정규직이 마동석 일리가 없었다.  


  전임자에게 인수인계를 받았다. 대부업 허가를 받기 위해서 서류를 제출하러 형님들이 올 것이라고 했다. 역시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나는 그 형님들을 맞이해서 서류를 받고 검토해서 정규직에게 넘기면 되는 것이었다. 망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일이 이렇게 된 거 살아남기 위해서 형님 민원인들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대하면서 절대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친절은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실수를 안 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인수인계를 마치니 사수인 정규직이 날 불렀다.


-천세곡 인수인계는  받으셨죠?

-네…


-근데, 무슨 일 있어요? 안색이 많이 어둡네요?

-아... 아닙니다.


-뭐, 얘기 들었다시피 우리는 대부업 부서인데... (중략) 서류 들고 민원인들이 많이 오실 거예요. 그거 잘 받아서 검토하시고 취합해서 저한테 주시면 돼요.

-네….ㅜ.ㅜ 그럼 저 오늘부터 잘 (죽을) 준비하면 될까요?


-오늘부터라니요? 얘기 못 들었어요? 신고기간은 아직 한참 후라서, 그전까지는 옆 부서 일 도와주면 되는데. 오늘 인수인계받은 거는 잘 기억했다가 신고기간 되면 그때 해주시면 돼요.


-네?? 신고기간이 언제인데요?

-세 달 후요.


-네?? 정말이요??


  그렇다. 신고기간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었고 오늘부터가 아니라 세 달 후였다. 그리고 그 신고기간이 오기 전까지는 대부업과 관련이 1도 없는 다른 업무를 하면 되는 것이었다. 지옥에 던져진 것 같았던 기분은 한순간에 날아올라 천국 위를 걷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세 달 후라니.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나는 6개월 기간제 알바였지만, 3개월째 재계약을 해야 하는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즉 이 말은 3개월 일한 후에 재계약을 하지 않고, 다른 곳에 지원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3개월마다 재계약하는 불안한 조건이 나를 살릴 수 있는 안전한 조건이 되는 순간이었다.


  정말 그 잔을 거두어주셨다. '형님'이 사라진 나의 알바 업무에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고 마음은 평화를 되찾았다. 대부업이 아닌 다른 일을 하게 되니 스트레스받을 일이 전혀 없었다. 스트레스가 없으니 퇴근 후에도 에너지가 남아돌았다. 에너지가 넘치니 인생에 찾아온 봄과 같은 시간들을 충분히 즐길 수 있었고, 이는 나에게 진정한 워라밸을 선사해주었다.  


   함께 근무하는 정규직들은 내가 두려워했던 '형님'과 다를 바 없는 미친개 김계장을 떠받들고 하루 종일을 버텨야만 했다. 그는 어떤 민원인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사람이었고 정규직들을 향한 그의 히스테리는 하루 종일 멈추질 않았다. 그렇게 시달리고도 오후 6시가 되면 리부팅하여 새로 출근이라도 한 듯 더 미친 듯이 일해야만 했다. 워라밸이 아닌 그냥 워(War)인 삶이었다.  


  알바로 일하는 동안 사무실의 어떤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나를 부러워했다. 완벽한 워라밸에 늘 웃음이 떠나지 않는 나를 향한 정규직들의 시선에는 부러움이 가득했다.  


  알바지만 괜찮다.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알바천국인가 봄.



매거진의 이전글 알바를 기억해 봄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