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약속과 베란다프로젝트

by 두루

우리는 10년 전 친했다. 그 시절 친구들에게선 반짝 반짝 빛이 났다. 사실 그 시절을 보내는 동안에는 막막하고 답답했고, 나누는 대화의 절반 정도는 징징거리는 소리들이었다. 빛이란 건 언제나 돌이켜봐야만 보이는 걸까. 돌이켜보면 빛나는 시절이었다. 20대 후반의 미모와 지성, 쾌활한 성격과 배려심 있는 인성까지 갖추었던 친구들, 그리고 나. 만나고 있던 남자친구 이야기를 시시콜콜 공유하고, 시험의 고단함을 위로하고 위로 받던 그 시절의 우리들.


로스쿨을 졸업하고 나서 한 1년 정도 우리는 여전히 자주 만났고, 그때의 화두는 연애였다. 친구들도 나도, 로스쿨 시절의 연애가 끝났다. 친구들은 모두 새로 연애를 시작했고, 시작되는 연애의 고단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고, 저마다 사회 생활에 적응하는 이야기를 나눴다. 졸업 후 1년 정도 지났을 무렵 어느새 친구들은 모두 결혼을 했다.


3년이라는 시간은 짧았다. 나는 이제 법학을 공부하는 방법을 알고 재미를 느꼈는데 벌써 졸업이라니, 로3을 한번만 더 했으면 좋겠다고 아쉬워했다. 우리가 같은 방향을 보던 것도 겨우 3년 이었다.


굵고 짧은 3년이 지나고, 어느새 우리는 10년차 변호사들이 되었다.


친구들은 아이들의 엄마가 되었다. 그들과 만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친구가 갑자기 저녁에 시간이 생겼다고 했다. 나는 금방 테니스 레슨이며 약속이며 모두 취소하고, 한달음에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


친구들은 한참 재밌게 이야기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2차를 가서도 수다는 끊이질 않았다. '이놈 아저씨' 어플이나 키즈까페, 아이를 데리고 가기 좋은 괜찮은 펜션이나 호텔 같은 이야기들. 영어 유치원의 효용성, 아이들의 발달 단계. 언어적 감각이 뛰어난 아이, 통제가 불가능할만큼 자유로운 둘째의 성향 같은 것. 나는 내가 들은 남의 집 딸 아들 이야기를 한번씩 덧붙이며 열심히 흥미롭게 이야기를 들었다.


친구들은 한때의 영광이었던 로스쿨에서의 좋은 성적을 내내 이야기 했다. 술이 거나하게 오른 친구들은 과거의 연애나 잘나갔던 시절의 이야기를 했다. 그땐 그랬지 하는 추억놀이는 지금 이 자리가 아니면 딱히 늘어놓지 못할 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회사나 테니스, 나의 오랫동안 끝내지 못한 악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나면 더이상 할 이야기가 없었다. 술에 취하자 대놓고 친구들이 판사와 성적에 관해, 과거의 영광에 대해 몇 시간동안 즐겁게 이야기 할 때, 나는 듣는척 하곤 손가락으론 내내 테니스 공지를 열심히 찾아보았다. 다음 주에는 테니스 일정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요즘 일하거나 운전할 때 '베란다프로젝트'의 앨범만 듣고 있다. 분명히 '베란다프로젝트'는 처음 들었을 땐 꽤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는데, 가사 하나가 멜로디가 전부 밥처럼 담백하고 달다. 여름이 가고 가을을 맞는 지금 이 약간 싱숭생숭한 절기에 은은하게 잘 어울리는 앨범이다.


친구와 장범준 벚꽃엔딩을 둘이서 한참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이놈 아저씨' 어플을 사용할 일이 없는 나는 친구들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공감하지 못해서 아쉬웠다.


집에 돌아와 이상순이 쓰고 선우정아가 부른 '네가 종일 내려'를 들으며 샤워를 하고 잘 준비를 했다. '있어줄래요, 내 모든 찰나에. 자꾸 목마르기만 해 메마른 맘. 여기 내리어 적셔주오. 혼자였던 지난 날마저 온통 물들어가길 그대의 흔적들로. 니가 종일 내려 내게로 흐르고, 촉촉해진 시간은 멈춰있네.'


친구들과 이런 감성을 다시 공유하긴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이 친구들 뿐만 아니라, 저 친구들과도 그 친구들과도. 인생의 어느 한 부분에서 나만 멈춰 있고, 친구들의 시선이 닿아있는 세계와 내 세계가 너무나 멀어지는 기분이 이렇게 여실히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친구의 아이들이 학교를 들어갈만큼 커지니 그런 것 같다.


별로 유쾌하지 않았던, 별로 경험하고 싶지도 않았던, 그럼에도 너무 많은 경험을 감수했던 나의 지난 30대의 소개팅과 선처럼, 가까웠던 친구들과 더이상 공감할 재료가 없는 경험 역시 앞으로 하기 싫지만 몇번이고 자연스럽게 감수해야하는 인생의 경험치이겠거니.


22. 8월쯤 썼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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