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있어봐라. 우리 헌아 한 닢 줘야지.”
외할머니는 한복 치마를 들어 하얀 고쟁이 허리춤에서 복주머니를 꺼냈다. 허리에 끈으로 맨 빨간 복주머니를 산타 보따리처럼 늘 지니고 다녔다.
빳빳한 새 돈을 꺼내서 내게 주며 다른 사람이 보기 전에 어서 주머니에 넣으라고 재촉했다. 우리 외할머니는 내게 한 푼 두 푼 주는 것이 낙이었다.
법당 공책을 예쁘게 썼을 때, 신경 쓰던 일을 해결했을 때, 손님들이 다녀간 후에도 깨끗한 새 돈을 주었다.
웃긴 얘기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방귀를 뽕 뀌면
“아이고 재미난 얘기 한다고 품 달라하네.”
하며 박장대소했다.
누구든 외할머니의 일을 도와주거나 심부름하면 복주머니 속 새 지폐를 받았다.
“요건 물건값이고, 요건 심부름 값이다.”
“할매는 사람들한테 왜 자꾸 돈을 줘?”
“품삯도 안 주고 일 시키면 안 된다. 일해주면 돈 받는 재미가 있어야지. 이왕이면 새 돈이 더 기분이 좋지.”
돈의 구겨진 부분을 펴고 찢어진 데는 테이프로 붙여서 그림을 맞춰 차곡차곡 정리해 놓으면, 엄마가 신권으로 바꿔왔다.
새 돈은 편지봉투에 넣어 한복 천으로 돌돌 말아서, 내복 상자에 담아 옷장 깊숙한 곳에 두었다.
나는 그 중요한 상자가 도둑한테 들킬까 항상 조마조마했었다.
명절이 되면 손주들과 아들, 딸, 며느리, 사위까지 모두 복주머니의 돈을 받았다. 적은 돈이지만 어른들도 수줍게 웃으며 좋아했다. 도깨비방망이 같은 복주머니였다.
법당을 나온 외할머니의 곱슬머리가 부스스해졌다.
새벽에 정갈하게 빗어도 정오가 되기 전에 흩날렸다. 숱이 줄어들고 머리카락이 가늘어져서 그런 것 같았다.
“머리가 이리 풀풀 날려서야 원,”
“아니야. 괜찮은데 뭐.”
화장품 가게에 가서 이야기하니 머리카락이 차분해진다며 ‘동백 에센스’를 보여줬다.
새 돈은 이럴 때 쓰는 것이 가장 뿌듯했다.
“할매 내가 좋은 거 사 왔어!”
“세상에 향도 좋고 이리 좋은 물건이 있네. 이런 게 있는 건 어찌 알았을꼬.”
머리에 발라진 에센스는 가게 주인의 말대로였다.
“아이고 신기한 일일세. 얼마나 줬는고?”
여러 번 물어도 가격을 말하지 않았더니, 복주머니에서 제값보다 많은 돈을 꺼내주었다.
돈을 받지 않으려는 내게 ‘할매가 주는 돈은 복돈’이라며 얼굴을 쓰다듬었다. 까슬하고 뻣뻣한 손가락이 따뜻해서 참 좋았다.
“다 쓰면 또 사 올게.”
“오야.”
차가 없는 우리는 오랫동안 불편했다.
택시도 찾기 힘들 때면, 이웃에 신세를 져야 했다.
그럴 때마다 외할머니는 복주머니를 열어 기름값이라며 꼭 챙겨주었다.
동생이 면허를 따자마자 폐차 직전의 중고차를 샀다.
우리의 첫차는 불편했던 날들을 모두 날려버릴 만큼 우리를 편하고 행복하게 했다.
외할머니는 동생이 운전하는 차를 탈 때마다 편하다며 좋아했다.
그리고 동생은 반짝반짝 빛나는 새 돈을 품삯으로 오랫동안 받았다.
“품을 줘야 재미가 나지.”
미소 지으며 말하던 외할머니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