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줄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지키고 있는가
요양원에는 밥을 삼키지 못하는 날들이 있다.
처음에는 일반식을 드신다.
그러다 물 한 모금에도 사레가 들리고,
목 깊은 곳에서 숨이 걸린 듯 기침이 터진다.
밥은 죽이 되고,
죽은 갈은 죽이 되고,
갈은 죽은 미음이 된다.
숟가락 위의 음식이 점점 묽어질수록
어르신의 하루도 함께 가늘어진다.
그리고 어느 날,
더 이상 삼킬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진다.
코를 통해 관을 넣는다.
위까지 이어진 가느다란 길.
그 길을 따라 하루의 열량과 단백질이 계산되어 들어간다.
콧줄이 연결되는 순간부터
두 손은 자유롭지 못하다.
무의식 중에 관을 잡아당기지 않도록
손목 보호대를 하거나 두꺼운 장갑을 낀다.
먹지 못하면 굶는다.
굶으면 결국 죽는다.
그래서 우리는 콧줄을 선택한다.
그러나 콧줄을 선택하는 순간
밥상 앞에서의 마지막 일상은 하나씩 무너진다.
몸이 많이 불편해진 어르신들 가운데
스스로 요양원을 선택한 분은 많지 않다.
치매로 기억이 흐려지고
시간과 장소의 감각이 사라질 때
결정은 대부분 보호자의 몫이 된다.
돌보다가, 또 돌보다가
더는 버틸 수 없는 어느 날
보호자들은 울면서 어르신을 맡긴다.
그리고 또 울면서
콧줄 삽입과 신체 보호에 동의한다.
나는 그 서명을 받을 때마다
이 선택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잠시 멈춰 생각하게 된다.
어디까지가 존엄일까.
숨이 붙어 있는 한 생명을 지키는 일이 존엄일까,
아니면 스스로 먹고 마시는 힘을
마지막 선으로 남겨두는 것이 존엄일까.
오늘 아침 기사에서는
콧줄을 연명치료 항목에 포함해야 한다는 논의가 소개되었다.
‘존엄한 죽음’을 위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주장과
‘생명 존중과 돌봄이 우선’이라는 반론이 맞서 있었다.
그 문장들을 읽다가
오늘 퇴원을 앞둔 한 어르신이 떠올랐다.
평소 삼킴이 어렵고
식사 거부가 잦아
하루 섭취량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던 분.
이제는 콧줄을 통해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게 된다.
체중은 다시 오를지 모른다.
활력 수치도 안정될지 모른다.
그런데 마음은 이상하게 가볍지 않다.
영양은 채워지지만
어르신의 일상은 더 줄어든다.
나는 다시 보호자에게 설명을 드리고
동의를 받고
손목 보호대를 준비할 것이다.
그 모든 절차를 마치고 돌아서는 순간
늘 같은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지금
생명을 지키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죽음의 시간을 조금 미루고 있는 것일까.
요양원은
삶과 죽음이 분명히 갈라지지 않는 공간이다.
그 사이, 아주 얇은 언저리에서
나는 오늘도 한 끼의 열량을 계산하고
한 사람의 존엄을 가늠한다.
정답은 여전히 없다.
다만
이 선택이 너무 가볍지 않도록
한 번 더 설명하고,
한 번 더 고민하고,
한 번 더 마음 아파하는 것.
어쩌면
밥을 삼키지 못하는 날들 속에서
우리가 지킬 수 있는 존엄은
그 정도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