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이 된 지는 1년이 조금 넘었다. 요즘 뉴스에서 보면 워낙에 핫한 이슈 중 하나로 급부상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공무원의 퇴직률이다. 하긴 누가 그렇게 적은 연봉으로 일하게 만들으래?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보다 더 큰 배후들이 많았음을 짐작하지도 못할 것이다. 나는 소심하게나마 폭로를 하고 싶다. 그렇지만 그것도 그렇게 큰 타격이 가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나의 말은 곧 진실이 아닐 수도 있고 나만 느꼈던 감정일 뿐으로 치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편안하게 앉아서 읽기를 바란다.
나는 공무원을 시작했을 때는 행복하지 않았다. 팬데믹으로 인해서 막혀버린 일자리 입구들이 수두룩 빽빽했다. 신입으로서 경험을 할 곳이 없었다. 나는 무엇이 하고 싶은지 모른 채 공무원을 준비하게 되었다. 공무원은 최소한의 인간적인 대우를 받는다는 일념 하나로 시작된 고생길이었다. 그 길은 나에게 평탄치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 길에서 만났던 교육은 나에게 큰 울림이 되기도 하였다. 세상에 다양한 교육체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동안 몰랐던 우리나라 역사와 문학, 비문학의 아름다움을 여기서 깨달았던 것 같았다. 공부하는 내내 불평불만만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상전은 상전 노릇을 해야만 했다. 나는 꼬박 아침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물을 마신 후 운동을 하러 나섰다. 레깅스를 반쯤 구겨 신어서 나가다 보면 어느새 펴져있었다. 스트레칭을 하고 달리기를 하고 근력운동을 하다 보면 7시 40분을 향해있다. 그때부터 침착하게 아침을 먹고 샤워를 한 다음에 밖을 나섰다. 밖의 공기는 언제나 달랐다. 어느 날은 기분이 좋아졌기도 했는데 어떤 날은 무척이나 음울한 공기 때문에 공부가 잘 되지 않았던 날도 있었다. 날씨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공무원시험의 낙방은 비참했다. 나는 당연히 될 줄 알았던 시험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애인이 쉽게 통과하길래 나도 쉽게 통과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시작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내가 애인을 무시한 경향이 있었나 모양이다. 나는 재기를 보았고 낙방했다. 그때 나의 자세는 그때보다 성숙해져 있었다. 나는 틀린 점을 자세히 분석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를 알면 지피지기 백전백승이었다. 나를 알고자 노력했던 한 달이 결국에는 성공을 이루어내고 말았다.
성공을 이룬 해야말로 정말 신나게 놀았다. 호주도 놀러 가고 엄마와 함께 여행도 떠났다. 여행만이 주는 행복만 있지 않았다. 내가 이젠 안정적으로 살 수 있다는 기쁨에서 오는 여유는 달랐다. 누군가는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야 하는 상태였는데 나는 정지된 상태에서도 마차가 굴러갔으니 말이다. 물론 그 사이에도 불미스러운 사건들도 많아 내가 아직까지 힘들어하는 일도 몇 가지 있긴 하다. 그래도 그 시기는 누구한테도 자랑할 수 있는 훌륭한 래스팅 시간이었다.
래스팅이 길어질수록 초초해지는 법이다. 나는 결국 2월 막판에 여행을 떠났고 돌아오자마자 발령소식을 들었다. 천만의 다행이었다. 만약에 해외에 있었더라면 듣지도 못했을 텐데 신이 도왔던 것 같다. 나는 출근을 했다. 그리고 출근해서 만난 사람들이 제법 착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친절함을 넘어서 따스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마음을 쉽게 준 것 같았다.
1년 동안 먼 곳으로 일하면서 눈코 붙일 새 없이 일하고 운동만 해왔다. 그러면서 크로스핏의 즐거움을 느꼈고 강하지는 힘에 으쓱해지는 어깨도 자랐다. 나는 민원인을 상대하는 공무원으로 일했는데 일이 쉬운 편이었다. 그렇게 복잡한 절차가 있지 않았고 일상적으로 일만 채우면 집에 갈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일에서 너무나 무료함을 느꼈다. 새로운 일이 터지지 않고 프로젝트별로 얻는 수입조차 없었던 것이었다. 나의 존재는 그저 프린터였다. 인사하고 프린트하고 그것이 전부였다. 몇 백 원의 실수가 나오면 그저 헤헤하고 웃고 넘어가면 되는 일들이 수두룩했다. 나는 그 1년을 아슬아슬하게 줄 타면서 보낸 것 같다.
그러다보니 난 사람을 너무 믿게 되었다. 사람을 믿을수록 잃는 기대도 큰 법이다. 그러면서 원래 갖고 있던 우울증이 심화되기도 했다. 게다가 몇 명의 사람이 나에게 너무나 무례했고 공무원에 대한 염증이 너무나 심각하게 찾아왔다. 나의 할 일은 그저 상급자의 지시하달을 처리할 뿐 그것에서 넘어서 내가 적극행정을 할 수 없는 경지였다. 적극행정을 구현하자고 말하는 공무원들의 특성상 적극행정을 하지 말라는 식의 속마음도 같이 전달되었다. 나는 그래서 아메리카노만 마시면서 하루를 보내고 또 운동을 하면서 지내다 보니 마음에 염증이 생겼다. 가슴에 구멍이 나버렸고 잠을 잘 수 없는 지경까지 가버렸다. 몇 날이고 며칠이고 잠을 꼬박 자지 못한 채 졸고 있다가 민원을 받은 적도 많았다. 나흘이 지나도록 잠을 못 잔 적도 많았다. 수면제를 받고 나서도 고쳐지지 않는 병이었다. 나는 더 이상 공무원을 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공무원이 적성인 사람도 제법 있다. 그러나 나는 공무원의 체계에 너무나 싫증이 나버렸다. 내가 적극적으로 전달한들 소극적으로 울리는 메아리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염화칼슘으로 도로를 뿌리고 행인 하나 안 다쳤으면 하는 기도 외에는 없었다. 경로당 축제가 열리면 술을 나르면서 홍어도 같이 잡숴보라고 권하는 공무원이었다. 서울의 공무원도 이 지경이니 나는 도저히 지방의 공무원은 상상도 못 할 것 같다. 아마도 등본을 집까지 배달해줘야 하는 시스템까지 있을 것만 같다. 모른다. 어떤 일이 나에게 발생할지
7급 공무원 어린 나이에 자살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사람들은 많이 놀랐고 공무원의 체계를 고쳐야 한다고 말했지만 정부 입장은 달랐다. 그녀를 탓했다. 누가 봐도 업무분장이 과도하게 짜여있었다. 그 자살로 인해서 한번 더 공무원의 세계를 고찰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음으로 우리 사회는 변했는지 말이다. 술자리에서 동장님의 사바사바를 들어가며 행동해야 하는 우리 어린 공무원들이 살아갈 곳이 맞나 싶다. 나는 그래서 공무원 체질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