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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드 입은 코끼리 Oct 15. 2024

친구의 가변성, 물의 흐름

수많은 사람들을 거치고 와서 지나고 보니,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인간관계가 너무나 많다는 것을 느꼈다. 인간은 사람을 탐닉하고 욕망한다. 그리고 그것은 유아기 시절부터 시작된다. 소꿉친구가 된 이상, 다른 친구랑 사귀는 일을 괘심 하게 여긴다. 한 번씩 친구에게 상처를 받는다. 그들의 의도가 순수했더라도 한 사람은 상처를 받고 오해가 생긴다. 더 이상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흠칫 놀라고 숨어버린다. 그렇게라도 하면 나를 다시 찾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말이다. 숨바꼭질이 끝나도 계속해서 미끄럼틀 밑에 숨어있는다. 그러고 눈물을 한 방울 떨군다. 그렇게 첫 친구를 잃어본다.


사람에 대해서 믿음이 사라지기 시작하면 친구에 대해서 낯을 가리기 시작한다. 의심부터 들고 그 사람에 대한 철학과 종교관, 모든 관심사를 꼬치꼬치 묻게 된다. 그렇다 보면 어느새 또 신나게 친구가 되어있다. 서로의 일기장을 빌려주면서 일기를 쓰기도 한다. 서로의 가족안부를 묻기도 하면서 집에 초대도 받는다. 나의 친구라고 자랑스럽게 어머니에게 소개를 하면 어머니도 함박웃음을 내지으며 한 보따리의 상을 가지고 온다. 사람은 그 자랑이 너무나 좋아했을 것이다.


초등학교가 지나면서 그 친구와 멀어지게 된다. 다른 학교로 찢어지면서 눈물을 꺾어서 흐르게 된다. 그 친구는 옆동네로 가기 때문에 더 이상 마주칠 수 없게 된다. 그래도 서로는 의미 없는 약속을 한다. 계속해서 연락하고 지내기로. 근데 단 한 번도 누가 먼저 연락을 하지 않는다. 그 연락은 부질없는 밥약속과 같았다.


그래서 결국 3년에 한 번씩 친구가 갈아 끼워진다. 같이 급식을 먹기 위한 친구로 따진다면 3월의 주기마다 사람이 바뀐다. 또한 그 또래의 친구 관심사를 맞추기 위해 자신을 잃기도 한다. 그 시대에 인기 있는 가수를 일부로 좋아하기도 한다. 유명한 음식이 있다면 먹어보고 좋아할 필요도 있어진다. 못 먹는 매운 떡볶이가 대표적인 예다. 호호 불어먹던 떡볶이의 찰진 윤기가 그 악마 같은 소스에 듬뿍 뿌려져 있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었다. 떡꼬치를 좋아하긴 했어도 이런 떡볶이류는 정말로 두려웠는데 어느새 2달만 지나면 친구 사귀기 위해서 그 떡볶이 같이 먹으러 가자고 한다.


대부분은 이렇게 동네 친구였다. 근데 하나둘씩 동네를 떠나는 시점이 또 생긴다. 그것은 입시를 위한 지역 이동이다. 지역들이 다양해지고 사람은 지역의 특색에 맞게 바뀌게 된다. 사투리가 강해지기도 하는 시기다. 타 동네 아이가 놀러 오면 무리 지어서 놀리기도 했다. 무심하게 굴던 때가 현재 비참하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그때는 그랬다. 우리의 집단이 너무나 소중했기에 조금만 다르면 우리는 개떼같이 짖어댔다.


마지막의 단계가 온다. 그것은 대학이다. 이젠 너무나 절친이었던 친구들이 서울로 가거나 지방에 있는 대학으로 간다. 친구가 또다시 사라져서 새롭게 사귀는 시기가 가장 크게 느껴지는 때다. 그리고 갓 성인이 되어서 그런지 성숙하게 지내야 한다는 강박도 생긴다. 그러면 이젠 자신의 옷차림도 달라지고 화장법도 조금씩 달라진다. 아니 입술은 그 당시에는 빨간색만 바를 수 있었는데, 이제는 나에 맞는 예쁘장한 코랄도 바를 수 있는 시기가 된다. 서울로 올라간 지방 친구의 같은 경우는 자신의 사투리가 낯설게 느껴져서 없애려고 노력한다. 그래도 그들만의 특이점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자신의 정, 자신의 고향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2년, 3년 흐르다 보면 서울사람이 다 되어있다.


서울사람이 된 시기부터는 연애도 자유롭게 몇 번 한 상태이다. 헤어지고 지지고 볶으면서 고등학교 친구에게 연락을 하기도 한다. 그때는 이제 선택적으로 친구가 남아져 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유치원 때의 친구가 남아있을 수도 있다. 그 친구에게 그 당시를 설명하면서 대화하면 안주가 필요 없을 때가 많다. 서울사람이 되어버린 자신을 되돌아보면 물처럼 떠내려가 바다로 흘러 내려왔다는 것을 느낀다.


시냇물이었던 자신은 졸졸 흘러내려가며 물줄기를 타고 내려가다 보니 한강을 만나고 어느새 바다를 도착해 있다. 그리고 어디로 향할지는 모르지만 망망대로 흘러간다. 흘러가다 보니 붙잡은 친구 몇 명은 있어도 대부분은 떠내려가 있다. 그렇게 마음고생하면서 아꼈던 친구들이었는데 이상하게 흘러져 있다. 그 친구의 소식은 다행히 요즘 세상에는 소셜 미디어가 존재해서 엿볼 수는 있다. 그렇다고 다시 그 친구와의 관계가 개선되지는 않는다. 누군가가 엄청난 용기를 가지고 만남을 주도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말이다. 결국 친구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사람만 남는다.


친구는 변하게 되는 마련이다. 같이 흘러갈 수도 있는데 어느새 핀란드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을 수도 있고 미국의 미시시피 강에서 놀고 있는 친구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제야 한강에 도착했다면 어쩔 수 없이 다시 비가 되어서 시냇물로 돌아갈 수 도 있다. 그럴 때가 온다 하더라도 울지 않고 가변성을 인정하고 물의 흐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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