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혜주다. 김혜주. 경주 김씨를 가진 흔하디흔한 김씨이다. 나는 사실 이렇게 평범하게 살고 싶지 않아서 발버둥 치다가 결국 벼랑 끝까지 몰려들어 온 파도처럼 살고 있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 결혼도 하지 않고 워커홀릭으로 살고 있다는 뜻이다. 일이 좋다. 일만이 나의 하루의 갱생이자 품이다. 품속으로 들어가 하찮은 일개미가 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나는 그것이 평범하지 않고 비범하다고 본다. 그 이유는 내 나이의 사람 중 단 한 명도 없는 43살에 커리어우먼이기 때문이다.
공무원이었으면 팽자팽자하면서 43살에 특별히 공들여서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데 나는 사기업, 그것도 외국계 회사를 다니고 있다. 외국계 의료 장비들을 수출·수입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보통은 남자들로 구성된 회사가 많은데도 나는 그런 곳에서 꽃같이 화사하게 피어오른 수련과도 같다. 보기 드문 수련은 아마 물속에서 어마무시하게 고생 끝에 태어난 흙진주 같은 존재다. 그리고 나 역시 진주와 다를 바 없었다. 매일매일 야무지게 필기하고 어시스트하다 보니 어느새 상사 위치에서 코칭하고 있는 내 자신을 보면 멋있다. 검정색 타이즈에 하얀 와이셔츠를 빼입고 걸어다니다 보면 세상을 다 가진 듯, 커피를 마시러 간다. 커피 한 모금이 마치 금덩이를 갈아 넣은 듯한 샴페인이라 할까? 축배를 들듯이 나는 힘차게 하루를 시작한다.
나의 유흥생활도 있다. 일에만 얽매여서 살고 있다기보다는 하나씩 새로운 취미를 얻고자 노력하는 편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새로운 취미 중 하나는 새로운 남자들 만나보기이다. 소개팅이 나이가 들어도 커리어가 탄탄해서인지 아니면 내 피부 탄력이 워낙 고주파로 좋아져서인지 모르겠다. 그냥 소개팅 전화가 하루에 어떻게 알고 온다. 그것도 그 유명한 결혼정보회사에서. 나는 그 정보회사에 가입도 하지 않았는데 연례행사 파티에 참석했으면 좋겠다고 나에게 항상 권유하자, 못 이기는 척하고 가입했다. 그러자 재미 삼아 보는 수준 비슷한 남자들의 구애를 보는 것이 너무 웃기다.
그 남자들 하나하나를 보면 왜 결혼을 이 나이가 되도록 못 했는지 알겠다. 한 사람은 워낙 바람기가 넘쳐서 여자를 보는 눈이 높아, 말 하나는 청산유수인데 전화기는 3개나 들고 다녔다. 그 사람이랑은 일주일 동안 만났는데, 결국 내 눈에 차지 않아서 별로라고 말하니 돌아오는 답변이 가관이었다. 그는 자신은 5명의 여자들과 동시에 소개팅하고 있었는데 잘되었다면서 버럭 소리를 지르고 전화를 끊었다. 그이는 정말 유머가 넘치도록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얼굴이 전혀 반반하지 않았고 이마 한가운데에 점이 있는 관상에 배불뚝이였는데 그렇게 패기 넘치게 말하는 것이 유머 그 자체였다.
한 사람은 젠틀하긴 해서 마음에 들까 싶었지만 그 역시 조금만 잘못 건드리면 상스러운 말들이 입에 달고 사는 데다가 가장 핫한 클럽을 다니는 것이 취미라면서 원나잇은 이틀에 한 번꼴로 해봤다고 했다. 젊을 적에는 여자들이 다 거기서 거기라며 우스갯소리로 말하는데, 그 말에 여자에 취한 마약쟁이같이 느껴졌다. 한 번 만나고 다시는 만나지 않았더니 그 사람이 내 직장에 들어와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김혜주, 여기 여자는 가슴이 평범하고 엉덩이는 볼록해서 볼수록 별로였다."
그렇게 소리치고 경비원들에게 쫓기고 결국 나는 그를 고소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그 사건 이후 나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사실 남자들이 하나둘씩 쉽게 느껴졌던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였다. 그냥 생물학적으로 다름없는 동등한 개체로서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한 부류였다. 그런데 나에게 이렇게 모욕감을 주고도 집행유예를 받고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살고 있다는 것에서 그런 "한남" 부류가 싫어졌다. 나는 이상하다고 말하는 여자 커뮤니티에 들어가 나의 이력을 밝히지 않고 이런 일들이 있었다고 털어놓자, 많은 여성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았다. 그들은 나의 아픔을 공격적으로 공감해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그런 놈들의 성기는 잘라도 마땅하다며 과격한 표현을 했는데, 그것이 나의 아픔을 순화해주었다.
결국 인터넷에서는 전사가 되어서 밤새도록 채팅창을 켜놓고 남자에 대한 분노를 일으키고, 낮에는 남자들이 득실한 곳에서 일을 하다 보니 머릿속이 엉망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나의 자아가 두 개로 분리되어 하나의 페르소나가 고장 나기 시작했다. 두 자아는 결국 나였기 때문에 물돌듯 흘러가며 분노의 자아가 가끔 일하면서 튀어나오곤 했다.
욕설이 난무한 컴퓨터 모니터. 나는 더 이상 내 자신을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몇 달 만에 나는 소문이 자자한 내 회사에서 내 발로 나오게 되었다. 나의 사랑하던 품이여, 이렇게 떠나는 것이 맞는가? 내가 잠깐의 유흥을 불러일으켰다고 내 씨앗의 태풍이 이렇게도 돌아오는 것인가? 나는 매도하면서 내 자신이 머리에 총 맞기를 바라며 걸어갔다. 그러다 보니 빨간불에서 초록불, 그리고 노란불에 횡단보도를 건넜고, 차에 치여 죽기를 바랐다. 빙고. 나는 차에 치였다. 나의 몸이 붕 떠올라 결국 바닥에 미끄러지듯이 착지하고 몸에서 피와 뇌수가 촉촉히 바닥을 적셨다. 나는 김혜주다. 경주의 김씨, 김혜주. 평범하게 가려다가 비범하게 날아올랐다가 결국 풍덩 떨어진 경주의 김혜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