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근데 나는 고양이를 사랑하는걸.
우리집에는 상처 고양이를 키운다. 상처를 입은 고양이가 아니라, 우리 가족의 상처를 아물기 위해서 존재하는 "상처" 고양이가 존재한다. 가족간의 화목함을 유지하고자 고양이가 들여왔는데 그 고양이가 우리에게 너무나 사랑스러운 존재로 남게 되었다. 고양이가 하품을 하면 가족 구성원들이 함박웃음을 짓는다. 고양이는 한걸음 한걸음 걸을 때 행복자국을 남기고 간다. 고양이가 심지어 화장실을 가도 귀엽다면서 쫄래쫄래 따라가서 쳐다본다. 고양이가 몸을 동그랗게 말아서 다리를 쭈욱 핀다면 우쭈주 노래를 부르면서 잘한다고 칭찬까지 해준다. 고양이는 매일 "간식"소리를 들으며 엄마 그림자를 바짝 들어 앉는다. 그리고 등뒤에서 야옹 야옹 우는데 그 소리는 구슬퍼서 "간식"을 안 줄 수가 없다.
고양이는 어떻게하든 행복을 주는 것 같지만, 나한테는 불편함을 안겨줄 때가 많다. 나는 우선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는지도 모른 상태에서 고양이를 덥썩 입양했다. 고양이가 날리는 털에 예민하게 반응해서 자칫 가까이하거나 만지거나 하면 온몸이 간지러워진다. 우둘투둘하게 올라오는 붉은색 반점과 아토피 자국들이 한꺼번에 열이 오른다. 고양이 한 마리가 주는 영향력이 꽤나 크다. 고양이를 쓰담아주는 것도 금해야하는것은 물론이고 고양이가 남기고 간 눈곱도 떼준 손으로 눈을 비비면(사실 그것은 내 잘못이 엄청 크지만) 눈이 부풀어 오른다. 눈이 부풀어 오르면 그때부터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눈이 떠지지 않기 때문에 몰골이 말이 아니고 사람들이 다 보면 놀라서 오히려 내가 위축된다. 숨어들게 된다. 고양이 이놈시키 하고 혼내려고 할때마다 고양이 자체가 주는 사랑스러움 때문에 나는 온몸이 마비가 된다. 찌릿찌릿하게 저려오지만은 그래도 좋다. 고양이가 그렇게 나에게 해악을 주는데도 좋다. 고양이가 사랑스럽게 움직일 때마다 나에게 주는 행복감은 배가 된다.
고양이를 강제로 붙잡고 배방구를 불어본 적이 있다. 입에 털뭉치가 쪽쪽 먹히는데도 좋았다. 내 몸에 들어가는 그 먼지투성이 고양이털은 뱃속에서 위장으로 살살 들어가 녹아들었겠지. 그 다음날 나는 역시나 온몸이 알레르기로 고생했다. 고양이는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며 비웃듯이 쳐다보았다. 야옹 한번 외치는 그 작은 울음은 어찌나 약오르던지. 자신은 그루밍하면서 여유를 마음껏 부렸다. 하지만 우리 식구들은 그렇지 않았다. 여유는 무슨. 방정맞게 챙기는 알레르기약과 치료연고제를 계속해서 퍼다발랐으니 말이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은 고양이가 좋아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고양이를 좋아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아파도 해주려고 한다. 그게 사랑이고 사랑이다. 그것이 나에게 주는 애뜻한 아린 사랑이다. 고양이가 주는 커다란 행복이 우울증의 늪에서 빠져나오게 해주는 유일한 치료제이다. 그런데 고양이는 나를 그리 반기지 않는다. 간식을 들고 있지 않는 한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 조건부 사랑을 행한다. 고양이는 나를 비비지도 꾹꾹이를 하지도 않는다.
고양이에게 오늘도 간식을 사다 바친다. 나를 좋아해주기를 바라며. 그렇지만 뭐. 아니겠지.
나는 오늘도 상처투성이 곰보투성이로 출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