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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드 입은 코끼리 Oct 21. 2024

체취가 아닌 향수

소설: 세상이 향수로 구분짓다

사람들에게서 나는 특정한 냄새가 있다. 그 집에서 풍겨져 내려오는 전통. 그 전통이 만약에 우리에게 없었더라면. 우리가 인위적으로만 뿌려서 나는 세계가 존재해 향수만으로 사람을 구별짓는 사회라면 어떨까에서 착안해서 쓴 단편 소설.



진영은 오늘 향수를 다 써버렸다. 매일매일 쓰다 보니 금방 닳았다. 조말론 코롱은 회사에서는 약하게 느껴져서 좋아했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고 너무 유명해서 자주 쓰고 싶지는 않았다. 회사에 들어와 패션향수들로만 가득했던 매대가 이제는 니치 향수까지 섭렵할 수 있는 재력이 생겼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이내 이렇게 사람의 향이 중요한 세상이 피폐한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거워졌다. 오늘은 퇴근 후 꼭 백화점에 가서 향수 한 병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퇴근 후, 회사에서는 여전히 조말론 향수와 배쓰앤보디웍스의 향이 많이 났다. 회사에서는 화려한 향수를 사용하지 않으려는 사람과, 점잖아 보이려는 사람으로 나뉘는 듯했다. 나는 자라에 향했다. 자라에도 괜찮은 향수가 많고 저렴해서 사기 편하다.


자라에서 시향을 해보려 했지만, 괜찮은 향수는 대부분 품절이었고, 내년에나 다시 출시될 예정이라는 소식이 많았다. 좋은 향수들이 가격까지 합리적이니, 사람들이 자신의 시그니처 향으로 삼으려고 미리 사두었으리라 짐작했다. 자라 매장을 나와 어디로 갈지 고민했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매장에서는 여성들이 자신의 손목에 향수를 뿌리며 킁킁대고 있었다. 직원들은 진짜 손님과 가짜 손님을 구분하기 어려워하는 듯 불안해 보였다.


결국 나는 학생 때처럼 올리브영에 가서 페라리 향수를 하나 샀다. 그리고 다른 향수를 사기 위해 인터넷에서 프라그랑티카를 검색하며 특별한 향을 찾아보기로 했다. 곧 있을 소개팅을 위해 독특한 향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회사에 가니 사람들이 나를 어린아이 취급하며 쳐다봤다. “프레데릭 말 향수가 아닌 페라리 향수라니?”라며 웃는 이들도 있었다. 어떤 상사는 “너의 청소년기를 대표하는 곳이 아니란다, 아들아”라며 지나갔다. 옷이 아무리 깔끔하고 날씬해 보여도 향수로만 평가받는 세상이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진영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회사에 평가받으러 온 건지, 일을 하러 온 건지 말이다.


며칠 후, 프라그랑티카에서 향수 소식을 읽고, 자신에게 어울릴 만한 향을 찾는 테스트를 해보았다. 그 결과, 이름 모를 유명 브랜드의 특이한 향조가 들어간 향수가 추천되었다. 중동에서 특히 잘 팔리며, 여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많이 사용된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가격은 톰 포드 로스트 체리보다 훨씬 비싼 60만 원대였다. 향을 맡아보지도 않았는데 그 큰 돈을 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결국 노트북을 닫고 담배를 피웠다.


담배의 자욱한 연기가 차라리 스며들기를 바랐다. 재작년까지는 담배의 니코틴 향이 유행해 전철에서 사람들 사이로 그 향이 은은히 퍼졌었다. 자신의 새로운 향이라며 퇴폐적인 옷차림에 잘린 스타킹을 신고 다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한동안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거리에서 중독자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달한 구어망드 노트가 유행하자 전철에서 느껴지는 달콤함 때문에 차를 살까 고민하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체취가 필요 없다는 반대 시위도 벌어지고, 향수 매장 앞에 긴 줄이 늘어서기도 했다. 구어망드의 시대는 너무나 달콤해서 멀미가 날 정도였다. 여자들뿐만 아니라 남자들까지 구어망드 향으로 치장해 누구의 향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화이트 머스크가 유행하던 시절이 깔끔하고 좋았다며 그리워하는 이들도 있었고, 일부는 다시 화이트 머스크를 뿌리기 시작했다.


진영은 구어망드 향을 뿌리지 않았다. 몇 년간의 니코틴 흡연 덕분에 이제는 그 냄새가 좋아졌고, 그것이 내 살결에 남길 바랐다. 그 냄새를 싫어하지 않는 여자가 나타나면 그 사람과 결혼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진영에게 잠자리는 마치 향과 연관된 행위처럼 느껴졌다. 향에서 오는 자극이 도파민을 온몸에 퍼지게 하고, 열정적으로 그 순간에 빠져들게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크리드 향수에 손이 갔다. 거금을 들여 백화점에서 니코틴이 달콤하게 들어간 아벤투스를 구입했다.


며칠 뒤, 데이팅 앱에서 그의 향이 좋다며 연락이 온 사람이 있었다. 최근에는 마주친 사람만 연락이 가능한 데이팅 앱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상대의 향을 통해 간접적으로 매력을 어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의 향을 확인했다. 구어망드였다. 예전에는 조말론을 쓰던 그녀가 이제는 레플리카 바이 더 파이어플레이스 향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유행을 좇아 살고 있다는 걸 깨닫고, 그녀를 차단했다.

오늘도 그의 사랑 찾기는 여전히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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