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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드 입은 코끼리 8시간전

내가 보았던 밀양

수필: 영화를 보고 잃었던 용서의 망각

나는 요즘 많은 것을 보고 읽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마치 챗지피티가 되어가고 싶어서 노력하는 중이다. 어느 정도의 지식과 지혜가 들어가게 된다면 내가 원하는 창의성과 깊이가 드러나지 않을까 싶어서 하는 노력이었다. 그렇게 얻어걸리는 문학, 문화 공부. 영화인을 만나서 단번에 추천받은 <밀양>이 너무 궁금했다. <케빈에 대하여> 영화를 인상 깊게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영화를 봤다면 시초의 영화 <밀양>을 한 번 보라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오래된 핸드폰과 어설픈 인테리어로 칠해진 어색한 2000년대 영화를 보았다.


그 영화는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게 된 여인과 그의 아들이 같이 밀양에 내려와 사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피아노 교습 학원을 운영하면서 동네 사람들과 많이 친해지게 되는데, 좁은 마을인지라 작은 말을 해도 모두가 다 알게 되는 그런 마을이었다. 밀양은 비밀이 없는 동네여서 그녀의 돈을 탐내는 사람도 생겼다. 그러다 보니 일어나게 된 납치 사건. 그녀의 아들을 납치한 것이다. 그 납치로 인해 신애(전도연)는 납치범이 원하는 대로 돈도 주고 하지만 결국에는 주검으로 변한 아들을 발견하고 만다. 신애는 그렇게 아들도 잃고 남편도 잃은 기구한 삶의 여인으로 등장한다. 울분과 신음으로 가득 찬 채로 살아가는 신애에게는 하나님의 종교를 믿으라고 하는 집사님과 목사님의 등장으로 조금씩 마음이 풀리게 된다. 신애는 마을사람들의 종교적인 도움을 받아 마음이 풀리고 살인자를 용서하고자 교도소 면회를 다녀온다. 그 곳에서 신애는 자신이 당신을 하나님을 통해 용서했다면서 말하자, 살인자 역시 자신도 회개와 함께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다면서 되받아친다. 거기서부터 오는 신애의 내면 붕괴.


이 영화는 우리가 말하는 회개와 기독교에 대한 회의감을 말해주고 또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준다. 용서라는 것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 또한 보이는 동시에 계속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준다는 그 성경의 말들이 과연 사실일까? 그렇다면 이런 시련들을 우리가 겪게 되는 일들이 어떻게 그의 의도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밀양으로 인해 용서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용서라는 것은 나한테는 망각과 비슷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용서는 그 당시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 마음이 편해지고 다른 사람 마음 또한 편하게 만들어주는 하나의 지표라고 과연  그것이 과연 사실일까? 우리가 망각하고 싶은 기억을 용서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잊고 싶어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영화 속에서 나오는 명장면, 내 자신도 용서하지 못했는데 살인자또한 용서가 받았다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며 말하는 그 담담함. 거기에서 느껴지는 묘한 아이러니. 살인을 저질렀는데 어찌 용서의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그들은 사회적으로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이인데, 사람으로서 도덕적으로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이인데, 오로지 가능한 종교로 용서를 받았다는 것도 아이러니. 둘의 치유 또한 종교에서 탄생했다는 것이 아이러니. 침착하게 미쳐 돌아가는 밀양 지역이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찬송가를 부르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살아가는데, 한 사람의 피폐함을 기도로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역설적이었다. 그 사람을 제대로 돌봐주는 사람 하나 없는데 기도로 돌봐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 또한 어찌 보면 방관자 아닌가?


그렇게 우리는 용서에 대해서 고민을 하게 되고, 아이를 잃어 울분을 터뜨리면서 미쳐가는 신애의 모습 속에 비춰지는 모성애 또한 서글펐다. 밀양의 도시는 이렇게도 미쳐있는 건가? 아니면 밀양이 아닌 서울도 이렇게 미쳐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사람 사는 일들은 사람으로 해결해야 하는 법, 하나님과 같은 종교로 절대적인 힘으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는 영화가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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