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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희 Feb 28. 2023

밤산책

산책을 나오지 않았다면 못 봤을 밤하늘이다

맘껏 먹고 몸이 둔해졌다.


아버지 생일이면 사형제와 손자 손녀가 한자리에 모두 모여 외식을 한다. 남동생의 결혼 직후부터 며느리 음식 준비의 번거로움을 덜고 싶었던 아버지는 나가 먹기를 고집하셨다. 그때부터 생일 파티는 식당에서 맛있는 걸 먹는 거로 대신하고 있다. 남동생이 사전에 메뉴를 뭐로 할 건지 물어보지만 대체로 우리는 갈빗집을 선호했다. 


이글이글 뻘겋게 달아오른 숯불에 양념갈비를 올리면 지글지글 고기 익는 냄새가 식욕을 한 것 자극한다.

부지런히 집게로 고기를 앞뒤로 뒤집으면 후끈한 열기와 매운 연기가 얼굴로 전해진다. 아이들은 빈 젓가락으로 덜 익은 고기를 들었다 놨다 하며 고기 익기를 기다린다. 잘 구워진 고기를 한 점 상추에 올려 절인 양파와 함께 먹는 즐거움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비빔냉면에 생일 케이크, 과일 후식까지 싹싹 비웠다. 자식과 손자 손녀들이 잘 먹는 모습만 바라봐도 흐뭇해하시는 아버지 얼굴이 내내 떠오른다. 


어릴 적 나는 매우 말라 아버지의 걱정 대상이었다. 아버지는 없는 돈에 돼지고기를 사다가 직접 수육을 만들어 주시기도 하고 생닭을 사다 튀겨 주시며 내가 많이 먹기를 바라셨다. 무조건 먹이고 싶어 하던 아버지 앞에서 음식을 남기기라도 하면 혼뜨검을 당하기 일쑤였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말랐던 나의 옛 시절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오늘도 아버지가 좋아한다는 핑계로 맘껏 먹다니 조금은 남길걸 그랬나 싶다. 


퇴직하고 갑자기 바뀐 생활패턴으로 두 달 사이 몸무게가 8킬로나 늘었다. 몸은 기민함이 사라지고 꾸물대기 시작했다. 머리까지 무거운 중력감 때문에 살짝 불쾌한 느낌까지 받았다. 

두 달을 탄수화물이 가득한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으며 움직임을 최소로 한 결과가 오늘의 사태를 불러왔다. 진입 장벽 없이 할 수 있는 걷기를 지난달부터 시작했는데 동생이 난데없이 코로나에 걸려 이번 주 내내 걷지 않았다.




밤 산책을 나왔다.


오늘 잔뜩 먹은 죄책감과 더는 나를 방치할 수 없다는 최소한의 의지로 밤 산책을 나왔다.

날 선 바람이 볼을 에이고 한기로 몸이 부르르 떨리며 10분도 안 돼 괜히 나왔다는 생각이 든다.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고 걷다 보니 어느새 아파트 안을 한 바퀴 돌았다. 나올 때 느꼈던 추위도 한결 부드러웠다. 


아파트 간이 농구장 조명이 시원치 않은지 어둑어둑하다. 희미한 불빛 아래서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농구공을 연신 바닥에 튕기며 현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공을 가진 아이 주변에 10여 명의 아이들이 손을 휘젓거나 재빠르게 앞을 막으며 연신 뛰어다니고 있다. 


농구장 넘어 테니스장 라이트가 너무 강해 눈이 시려 고개를 홱 돌렸더니 그 너머 스터디 카페와 독서실, 영어, 수학 입시학원, 음악학원의 네온 간판이 무질서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 밤에 놀려는 아이들과 그들을 붙잡아 공부시키려는 학원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밤의 시간을 밝히고 있다.  동네 학원이 저렇게나 많은 줄 캄캄한 밤이 돼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보통 걸을 때 뉴스나 강의, 영어 회화를 듣는 습관이 있다. 오랜 기간 시간을 아껴 쓰기 위해 두 개를 같이 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서다. 청소와 운동, 운전할 때도, 전철이나 버스를 탈 때도 무언가 머릿속에 꾸겨 넣고 싶은 욕망이 가뜩했던 것 같다. 그렇게 사는 것이 경쟁사회에서 잘 사는 거로 생각했지만, 부질없다는 생각에 요즘은 걷기에 집중한다.  


젊은 부부의 대화가 뒤에서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나를 앞질러 갔다. 딸아이와 나온 아빠도, 자신보다 덩치가 큰 골든레트리버를 산책시키는 젊은 아가씨도 나를 제치고 멀어져 갔다.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보폭을 크고 빠르게 걸어야 하는데 욕심껏 먹었던 음식 탓에 더디고 둔하다. 과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 틀리지 않는 말인 것 같다.


밤 산책은 어둠이 온 세상을 덮어 버려 남의 시선에 갇히지 않고 운동할 수 있어 좋다.

무릎 나온 볼품없는 바지에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편하게 걸을 수 있다. 운동화만 있으면 지금 바로 나와 걷을 수 있는 이 소박한 밤 산책이 편하다.  


걷다 보니 까만 밤하늘이 높고 선명했다. 산책로를 따라 길게 늘어선 니키타 소나무들이 하늘에 맞닿을 작정이라도 할 듯 큰 키를 자랑하며 하늘로 높이 솟아있다. 

검고 푸른 밤하늘에 반달이 수줍은 우윳빛을 내며 산책길을 비추고 있다. 아파트와 상가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에 가려 평소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별들도 깊이를 알 수 없는 밤하늘에 꼭꼭 박혀 제 빛을 내고 있다. 


산책을 나오지 않았다면 못 봤을 밤하늘이다. 오늘 밤은 비우고 푹 잘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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