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바람이 지나간다.
풍요로운 게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어린 시절 엄마는 아버지 봉급날이면 무조건 쌀과 연탄부터 샀다.
부엌 옆에 딸린 허름한 창고에 내 키보다 높이 쌓인 연탄을 보며 엄마는 그 누구도 부러울 것 없다는 미소를 지으셨다. 투박한 항아리 입구까지 윤기가 흐르는 쌀을 가득 채우면 엄마는 한없이 너그러운 얼굴로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며 좋아하셨다.
연탄과 쌀을 사는 것은 긴긴 겨울, 네 남매 배곯지 않게 키우기 위한 엄마의 생존본능에서 나온 행위다.
그 후 살림이 좋아졌어도 엄마는 뭐든 부족한 것보다는 넉넉한 쪽을 택했다.
밥을 먹다 남기기라도 하면 큰일 나는 줄 알았고, 다 먹고 일어나기라도 하려면 어느샌가 밥 한 주걱을 퍼서 내 그릇에 덜며 더 먹으라 하셨다.
자연스럽게 나도 여유 있게 쟁여 두는 습관을 가지고 살았다.
1+1 상품이니 절반가격이라고, 의미가 있는 상품이라고, 카페 감성의 요런 저런 아이템들을 사 모으는 재미에 푹 빠져있었다. 변명하자면 고된 직장생활 중 누릴 수 있는 취미라고나 할까? 돈 쓰는 즐거움은 내게 줄 수 있는 작은 위안이라 생각했다.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으로 끝없이 밀어 올리는 형벌에 처한 시시포스의 지옥처럼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직장생활의 고달픔을 매달 수혈되는 월급으로 즐거운 쇼핑을 하며 소비 중독에 빠져 지냈다.
월급은 일부 저축을 제외하곤 카드값과 보험료, 공과금으로 정신없이 빠져나가 통장은 곧 텅장이 되었다.
오늘은 '버스커 버스커'의 봄노래를 노동요 삼아 틀어놓고 봄맞이 청소를 했다.
겨울옷 정리를 하다 보니 비슷한 종류의 재킷과 바지, 셔츠가 몇 벌씩이나 있다. 기능이 중복된 옷과, 유행이 지난 옷, 작아진 옷을 분류해 정리했지만, 살 좀 빼고 입을까? 이건 좀 비싸게 샀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몇 개는 옷장 안으로 들어갔다. 당분간 가지고 있던 옷만 입어도 몇 년을 버틸 수 있을 거다.
또 하나 골칫거리는 냉장고 청소다. 엄마가 준 고춧가루, 언제 들어왔는지 기억도 없는 고기와 떡, 피자가 숨 쉴 공간 없이 빼곡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정리하다 보니 밤낮없이 일해서 저 짓거리를 했던 내게 화가 난다. 쟁여 놓기 위한 소비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냉장고 안의 반을 버렸더니 속이 시원하다.
오래전에 읽었던 법정 스님의 책에 '스스로 행복하라 '에서 '집착이란 바다에서 소금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마실수록 더 목이 마르다. 무엇이든 차지하고 채우려고만 하면 맑은 바람이 지나갈 여백이 없다'라는 글이 있다. 꼭 나를 두고 하신 스님의 말씀 같았다.
책을 읽을 때도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한다고 한참을 버렸는데 어느샌가 빼꼼히 들어온 물건이 꽤 많았다.
집 정리 후에 나온 쓰레기들을 5개 봉투에 나눠 담았다. 배출하려고 쌓아둔 쓰레기봉투를 보면서 나의 욕망덩어리를 보는 것처럼 한동안 부끄러웠다. 그동안 바람 한 점 없는 삶을 살아왔구나. 집안을 치우고 한결 넓어진 공간을 만들었더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퇴직하고 받는 연금은 현직에 있을 때보다 턱없이 적은 금액이지만 불편하지 않다. 물건을 정리하니 신경 써 관리할 일도 없고 적은 소비로 많은 돈도 필요하지 않다.
오늘 가계에서 두부 한 모와 파 한 단을 사 와 두부 부침을 해 먹고 남은 파는 빈 화분에 심어 물을 주었다.
지난여름에 말려 놓은 옥수수수염을 꺼내 차로 끓였더니 깊고 구수한 맛이 난다.
오후의 따스한 햇살이 거실 안 깊숙이 들어오고 열린 문틈으로 봄바람이 분다.
스님이 말씀하신 바람이 내 삶의 여백 안으로 들어왔다.
삶이 정갈해진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