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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혼잣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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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희 Jun 05. 2023

김치는 먹기 싫었는데

 

삶이 헛헛해질 때 


식탁 위에 김치통이 놓여 있다. 딸아이는 오늘도 말없이 엄마의 집을 다녀왔나 보다. 

엄마가 사는 집에 가끔 들러 엄마가 해준 밥도 먹고 배추김치, 물김치, 마늘장아찌를 얻어 가지고 온다. 딸인 나보다 손녀인 딸이 엄마집에 더 자주 들려 싸주는 반찬거리를 들고 온다.


어릴 적 엄마의 음식이 싫었다.  도시락 반찬에 매일 김치와 단무지만 싸주던 엄마가 미웠다.  소시지, 장조림, 멸치볶음, 계란프라이, 친구들의 화려한 도시락 반찬 앞에 시큼한 김치 냄새나는 누런 양은도시락을 가져갈 때마다 기가 죽었다.  어느 날은 교과서와 공책까지 김치국물이 묻어나서 학기 내내 그 교과서를 필 때마다 나의 가난에 화가 났다.  그 지긋지긋한 김치가 담긴 도시락, 평생 김치 따위는 안 먹고 살 기세였다.


시집가서 이상하게도 엄마의 김치가 생각났다.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그 냄새나던 김치가 먹고 싶었다. 삶이 헛헛해졌을 때도 엄마가 만든 김치에 돼지고기 숭숭 썰어 넣은 매콤한 김치찌개가 눈물 나게 그리웠다.  


엄마의 배추김치가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날이 많아지면서 나도 나이가 들기 시작했다. 젊은 날의 풋풋함은 사라지고 묵은지처럼 탄력 떨어진 얼굴에 여기저기 삶의 흔적이 주름으로 나타났다. 엄마도 이제는 허리가 굽은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점점 야위어가는 엄마의 모습에 마음이 찡하다. 어릴 적 엄마의 나이 보다 더 먹었지만 여전히 엄마가 했던 음식을 못 만든다. 김치를 해도, 장아찌를 해도 엄마의 맛을 내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시시하지 않은 일들


퇴직하고 맘껏 여행도 다니고 엄마랑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인터넷에서 효도 여행이란 단어를 검색하며 내내 설레었다. 어딜 가면 좋을까? 곧 날이 더워지니 북해도에 가 보랏빛으로 물든 라벤더를 보고 달빛 아래 온천을 하며 수다를 마음껏 떨고 싶었다. 동생에게 북해도 여행지를 톡으로 공유시켜 보냈는데 바로 전화가 왔다. 엄마가 공원에서 쓰러져 걷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여행 가기 힘들다고 말한다. 근데 왜 나는 몰랐지? 


엄마는 늘 괜찮다고 하셨는데 아픈 데 없다고 하셨는데 여권을 만들자는 동생의 말에 힘들어 못 갈 것 같다고 이제야 말했다. 핑계 같지만 직장 다니며 시부모님과 평생 같이 살다 보니 엄마랑 여행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세월만 보냈다. 

퇴직하고 시간이 많아지면 하려고 뒤로 미루었던 일들 중 하나였는데, 평범한 여행도 결국 못하게 되었다. 인생에 좋은 때란 따로 없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엄마가 아픈 것도 모르던 나한테 화가 났다.  어린 시절 도시락통에서 터져 나온 김칫국물처럼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터져버렸다. 



뜨거운 바람이 불더니 비가 내렸다. 

일단 여행 대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엄마랑 많은 시간을 보내자고 동생과 약속했다. 동생이 토종닭에 밤과 은행, 마늘, 대추를 같이 넣어 푹 삶은 닭백숙을 만들었고 나는 사골국과 엄마가 좋아하는 나물을 싸서 엄마 집에 같이 갔다.  엄마와 아빠는 뭐 하러 힘든데 이런 걸 만들어 왔냐며 안절부절못한다. 밥 한 끼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앉아 상을 받는 법이 없다. 연신 냉장고 문을 열며 이것저것 차리느라 정신이 없다.  엄마는 늘 작고 평범한 일에 감사하는 소박한 사람이다.  간간히 웃을 때마다 깊이 팬 주름이 더 선명해지지만 엄마의 웃는 모습이 좋다. 흑색 사진 속 곱디고운 우리 엄마는 이제 등이 굽고 왜소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새삼 낯설다.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날 늦은 저녁, 가게에서 물오른 오이를 사 와 처음으로 오이지를 담갔다. 오이지가 노랗게 익으면 오이지무침과 냉국을 해 엄마와 먹고 싶었다. 오이지가 잘 익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몇 번이나 오이지 통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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