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병원에서 원장님들이랑 저녁을 먹다가
대화가 묘하게 흘렀다.
계엄령이니, 전쟁이니, 핵이 떨어지면 어디까지 죽냐는 얘기까지 나왔고
나는 그 틈에 툭 말했다.
“그래서 서울 살아야 해요. 전쟁 나면 핵 맞아서 한 방에 갈 수 있거든요.”
다들 펑펑 웃었다.
“맞아, 진짜 서울 살아야겠네.”
그 분위기 속에서 나는 한 마디 더 얹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랑 같이 한 방에 가는 게, 얼마나 좋아요?”
웃으면서 한 말이었지만,
나는 꽤 진심이었다.
나는 죽음이 무섭지는 않다.
무서운 건, 애매하게 남겨지는 거다.
살아 있는지, 죽은 건지 모를 상태로
긴 시간 침대 위에 머물던 중환자들을
나는 꽤 오랜 시간 수 없이 봐왔다.
그 사람보다 더 아프게 보였던 건
그 곁에 남겨진 사람들이었다.
희망과 체념 사이를 오가며, 침묵으로 , 또 울면서 돌아가는 가족들의 등을 보며 나는 확실히 알게 됐다.
죽음은 죽은 사람의 몫이 아니다.
죽음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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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그렇게 가까이에서 보고도
사실 나는 한때 정말 많이 죽고 싶었다.
그땐 너무 우울했고,
내가 사라져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몇 번씩 반복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죽지 않았다.
죽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단지 엄마와 아빠 때문이었다.
내가 죽는다면, 그건 나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엄마와 아빠 인생에서 ‘죽음’이 시작되는 거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내 죽음이 그들의 몫이 되어버리는 걸,
나는 견딜 수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이 겪어야 할 고통을
내가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내 감정을 끌어안고 견딜 수는 있어도,
누군가의 삶을 무너뜨리는 선택은 하기 싫었다.
그래서, 나는 한 번도 그 선을 넘지 않았다.
죽고 싶다는 생각과 진짜 죽음을 택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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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이해한다는 건,
죽음을 미화하거나 극복하는 게 아니라
그걸 어깨에 얹고, 시간을 들여 살아내는 법을 배워가는 일에 가깝다.
죽음에 대해 오래 생각해 왔던 것 같다.
죽는다는 사실이 두려워 움츠리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또 누군가는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조금 더 자유롭게 살아간다.
나는 뭘 더 해야 해서가 아니라,
그냥 살아 있다는 상태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살아온 시간들이 있었다.
그저 버티는 방식으로 하루하루를 이어가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요즘엔, 죽음을 더 선명하게 느끼려면
오히려 더 생생하게 살아내야 하지 않을까—
이상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생각이 든다.
죽음은 사실 두렵지도, 그렇다고 익숙하지도 않다.
그건 누구에게나 똑같이 낯선 영역이다.
그래서 나는 죽음을 끊임없이 상상하는 대신,
‘죽음이 있다는 전제’를 조용히 품고
지금을 더 또렷하게 살아가 보려 한다.
한 방에 가기 전이라면,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을 조금은 더 명확하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핵 얘기하다가도 웃으며
“서울 좋아요. 한 방에 갈 수 있어서요.”라는 말을
너무 심각하지 않게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게 웃기니까. 그리고 그게,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음을 견딜 수 있는 방식 중 하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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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울에 산다.
전세 비싸고, 물가 높고, 사람들 너무 많지만.
진짜 핵 한 방에 같이 가면… 낭만적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