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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김보다 중요한 걸 잊었더라

내가 힘들었던 건 김이 아니라, 내 마음이었다

by 담연

오늘은 남편이 재택근무를 하는 날이라, 아침이 조금 여유로웠다.
평소 같았으면 아이 밥에 남편 도시락까지 챙기고,
그를 직장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면 이미 오전 10시.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어젯밤 아이와 자느라 설쳤던 잠도
침대에서 9시까지 늘어지게 누워 있을 수 있었고,
남편은 그런 나를 보며 방으로 와 다정하게 “굿모닝”을 건넸다.


그는 오늘만큼은 맥모닝이 먹고 싶다고 했다.
몸은 무거웠지만, 대신 집에 있는 식재료로 그럴싸한 피쉬버거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식빵을 버터에 구워 스크램블에그를 만들고, 냉동실에 남아있던 대구튀김도 꺼냈다.
소스는 마요네즈와 케첩을 섞어 감칠맛을 더했다.
입맛에 까다로운 남편이 한입 베어 물고 “나이스!”를 외치던 순간,
뿌듯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그렇게 아침을 보내고, 나는 아이와 산책을 나갈 준비를 했다.
텀블러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타고, 아이 물병도 챙겼다.
그리고 집을 나서기 전, 헬퍼 니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점심엔 김밥 싸려고 하니까, 당근이랑 계란이랑 햄 좀 준비해줘요.”
우리는 김밥을 한 달에 네다섯 번은 싸 먹는 편이라,
그녀에게도 꽤 익숙한 준비였다.


밖에서 아이와 보낸 시간은 참 따뜻했다.
놀이터에서 만난 네 살 독일 소년 미카는
우리 아이가 타고 있는 그네 앞에 서서,
작은 손으로 벌레를 하나하나 쫓아내고 있었다.
그는 우리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며,
“몇 살이야? 말은 해?”라고 묻고,
옆에 서서 조심스럽게 그네를 밀어주기도 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다정하고 귀엽던지.
나는 속으로 ‘우리 아기에게 동네 오빠가 생긴 걸까?’ 하고 웃었다.


미카의 헬퍼와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30년 넘게 싱가포르에서 가정도우미로 일해왔고,
얼마 전 필리핀의 딸이 손녀를 낳았다고 했다.
핸드폰을 꺼내 조심스럽게 보여준 아기 사진에는
사랑이 뚝뚝 묻어 있었다.


그 따뜻한 시간을 뒤로 하고,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도착하자마자 아이 샤워를 시키고,
주방으로 가보니 니젤이 김밥 재료를 아직 손질하고 있었다.
시간은 어느새 오후 12시 20분.


나는 서둘러 마음이 급해졌다.
남편이 제시간에 점심을 먹고, 다시 서재로 들어가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도
내가 아내로서 해내고 싶은 중요한 루틴 중 하나다.
남편의 배꼽시계는 정직해서,
12시가 되면 늘 점심을 기다린다.
그리고 1시면 다시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업무에 몰입한다.


하지만 12시 30분이 넘어서야 겨우 김밥을 말기 시작했고,
그때서야 나는 결정적인 것을 깨달았다.
김밥김이 없다.


냉동실을 샅샅이 뒤졌지만 보이지 않았다.
니젤에게 물어도 없다고 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김밥 재료 준비하기 전에 김밥김이랑 다 갖춰져 있는지 확인했어야지.”


지금 생각하면,
남편의 점심이 늦어지는 게 걱정되어
내 안의 조급함이 제멋대로 폭발했던 것 같다.
김밥김을 보관하는 사람도, 메뉴를 정한 사람도 나인데
괜히 니젤에게 불필요한 말이 툭 튀어나왔다.


결국 부서지기 쉬운 곱창김으로
엉성하게 김밥을 말았다.
옆구리가 터졌지만, 입으로 들어가면 그게 그거니까…
남편은 조용히 먹었고, 나는 식사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심지어 남편도 내가 니젤에게 한 말을 들었는지
내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아이를 재우고, 나는 조용히 주방으로 향했다.
니젤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까 김 없다고 탓한 거, 미안해.”


그녀는 냉장고 정리를 하다 말고 나를 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맴! 김밥김 여기 있었어요!”


냉동실 저 구석,
내가 직접 지퍼백에 넣어두고 잊어버렸던 그것.
나는 내 잘못을 다시 한 번 확인했고,
괜히 남의 탓을 했다는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니젤은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주방일에 몰입하고 있었다.
분명 속상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는 스스로 마음을 정리한 듯 보였다.


도대체 나는 얼마나 더 살아야 이런 순간들에 현명해질 수 있을까.
그깟 김밥김 하나로 기분 좋던 하루가 흐려졌고,
나는 또 하나의 미안함을 배운 날이었다.


그녀 덕분에 아침 피쉬버거를 남편에게 준비할 수 있었고,
그녀 덕분에 아이와 마음 편히 놀이터에서 웃을 수 있었다.
그 사실을 기억하고, 내 마음을 예쁘게 먹는 것.
오늘 하루가 내게 준 숙제다.



가끔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소한 말 한마디가
하루를 뒤흔들고, 마음에 오래 남기도 하죠.
이 글은 김밥김 하나로 시작된 나의 감정 이야기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느껴봤을지도 모를 마음,
그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아 적어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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