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참 다양한 사람이 산다. 50억 가지가 넘는 경우가 있나 싶을 정도다. 하기야 한 뱃속에서 나온 쌍둥이도 다른 걸 보면 그게 당연한 거 같지만 때론 신비롭기까지 하다. 우리 집은 4남매가 있는데 종자가 다른가? 할 정도로 외모도 성격도 다르다. 남매가 아니면 얼굴이나 보고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 때가 간혹 있다. 어릴 때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특히 이양이랑 많이 싸웠다. 이양은 나뿐만 아니라 셋째랑도 막내랑도 치열하게 싸웠던 아이다. 고집 세고 무데뽀다. 어릴 때부터 꾸미기를 좋아하고 깔끔을 떨었다. 자기 전 다음날 입고 갈 옷을 준비하느라 밤에 시간을 쏟았던 녀석이다. 옷에 맞춰 신발까지 정비를 해야만 잠을 잤다. 우리는 다 같이 한방에서 지냈는데 그 꼴을 맨날 보고 제발 그만 좀 하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엄마는 한배 속에서 나온 자식도 이리도 다른데 남은 오죽하겠냐고 항상 말씀하셨다.
이양은 어릴 때 공부를 전혀 안 했다. 학교 들어가기 전 시골에서 서울로 이사를 와서 바쁜 엄마 아빠가 둘째를 봐줄 수 없었다. 나는 시골에서 극성 엄마에게 배울 거 다 배우고 학교를 다녀서 학교생활이 힘들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국민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전학 와서 받았던 충격에 어린 나이에도 학교 가기가 싫었는데 이양은 오죽했을까 싶다. 이양과 나는 두 살 터울이라 내가 3학년 때 같은 학교 입학을 했다. 함바집을 하던 엄마 아빠가 어린 자식을 돌보는 건 그저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일이 다였다. 공사판 한편에 마련한 판자로 만든 식당에 딸린 작은방에 온 식구랑 같이 일봐주던 친척들이 같이 살았으니 얼마나 정신이 없었을까?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생활을 했다. 그런 상황에 이양이 입학을 했으니 겨우 책가방이나 챙겨서 언니 손잡고 학교 보내는 게 다였다. 한글도 숫자도 배우지 못하고 학교를 다닌 이양은 학교생활이 힘이 들었는지 그때는 물어보지 못했는데 행동으로는 알 수가 있었다.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아들이 있었는데 같은 학교를 다녔다. 1학년이라 수업이 끝나면 엄마가 있는 우리 교실로 와서 작은 책상에 앉아서 수업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서 할 것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되질 않는 일인데 그때는 그게 당연했다. 어린 동생이라 우리 반 아이들은 그 아이를 귀여워해 줬고, 선생님이 잠깐 자리를 비우면 우리가 돌봐주기도 했었다. 그런 아이가 내 동생 이양이랑 같은 반이라고 했다. 그래서 안부를 물어보려고 한건 아닌데 동생이 끝나고 집에 혼자 갔을까 궁금해서 이양은 갔니? 했더니 황당한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이양은 가끔 지각을 하고 운동장에 있는 구름사다리나 정글짐에서 하루 종일 앉아 있는다고 했다. 그럴 리가 없다. 학교를 같이 와서 분명히 교실로 들어가라고 하고 나는 우리 교실을 갔었다. 아이들이 하도 많아서 2부제 수업이 있을 때도 동생은 일찍 끝나서 기다릴 때가 간혹 있었지만 그래도 교실을 안 들어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러면서 밖을 보니 진짜 이양이 혼자 정글짐 꼭대기에 앉아서 있었다. 이건 뭐지? 쟤가 저기서 뭐 하는 거지? 아유 창피하게 뭐 하는 거냐? 3학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부끄러움이 다 느끼는 순간이었다.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그날의 장면은 생생하다. 정글짐에 한두 번 올라가서 있던 아이가 아니었다. 나는 무서워서 꼭대기는 올라갈 시도조차 하질 않는데 그 아이는 꼭대기가 자기 안방인 양 편안해 보였다. 교실에 있는 것보다 좋았나 보다. 그때부터 학습부진이 시작하더니 내내 공부를 싫어하고 못하는 아이여서 엄마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돈이나 벌라고 했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틈틈이 동생에게 과외를 시켜줬다. 주산학원도 보내줬다. 나는 안 보내준 주산학원을 이양은 다니기 싫다고 해도 몇 년을 보냈다. 그랬던 이양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직을 했다. 좋아하는 옷도 맘대로 사고하고 싶은 걸 하는 게 남은 자매들은 그저 부러웠다. 아르바이트를 틈틈이 해도 월급에는 못 미치니 언제나 이양이 산 옷을 몰래 빼앗아 입는 게 일이었다. 나랑 셋째 여동생은 이양이 출근하면 몰래 옷을 입고 일찍 집에 와서 걸어두곤 했었다. 걸리면 끝장나는데 힘이 장사라 아무도 못 말린다. 고함과 몸싸움은 세계 1등인 아이라 남은 우리 3명이랑 싸워도 절대 지는 법이 없다.
그랬던 이양이 먼저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시집살이를 하면서 어른이 되어갔다. 유별난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등쌀에 못 살겠다는 소리를 백 번도 더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만 나온 동생이 부족해 보이니 이것저것 가르친다고 마찰이 있었던 것 같다. 이양은 미용사를 하겠다고 학원도 다녔고 보조도 몇 년 했었다. 미용실 다니면서 하기 싫은 일을 하니까 죽기보다 더 싫었다고 했다. 세상 온갖 진상은 미용실에 다 온다고 만날 때마다 투덜거렸다. 하지만 좋은 건 어릴 때부터 남다른 패션 감각이 이곳에서는 맘껏 해도 튀지 않는다는 거였다. 머리며 옷이며 장신구며 하고픈 걸 다 하고 다녔다. 그러니 시댁에서는 곱게 볼일이 더더욱 없었을 터.
그러다 내가 선생님이 급해서 딱 2주만 공백 없이 수업을 해주면 좋겠다고 부탁을 했다. 그때는 정말 지나가는 누구라도 잡아서 일을 시켜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내가 아는 누구가 없었다. 2주를 채워줄 사람이 없다는 게 얼마나 x 줄타는 일인지. 그 수업을 못하면 대형사고다. 불은 꺼야겠기에 창동에 사는 이양을 송파까지 불러서 수업을 들어가라고 했다. 다행인 건 이양의 자식들, 즉 내 조카 두 명이 어릴 때부터 우리 학습지를 오랫동안 시켜서 웬만한 교재와 시스템은 알고 있었다. 특히 미용실에서 각종 사람들을 대한 경험이 있어서 회원 학부모 상담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2주를 때우러 와서 동생은 신나게 일을 하는데 얼굴 표정이 달라졌다. 좋아하는 일을 했을 때의 표정이었다. 물어보니 이렇게 즐거운 일이면 평생 할 수 있을 거 같다는 거다. 이거 뭐지? 적성을 찾은 건가?
공부도 안 하던 이양이 아이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다는 건 그녀를 아는 사람들에겐 신화 같은 이야기다. 내가 지국장으로 발령 나면서 동생을 송파에서 같이 일하자고 데려왔다. 동생은 그동안 사이버대학도 다녔다. 공부를 해야겠다는데 철이 들었나보다. 등록금은 미국에 있는 동생이 찬조를 했다. 졸업하기까지 일과 공부가 쉬웠겠는가? 누구보다 더 열심히 살았던 이양이다. 우리 지국에 없어서는 안 될 에이스 교사다. 3년 연속 연간 지국실적 1등 교사다. 출퇴근만 2시간이 넘는다. 언니만 아니면 여기까지 올 일이 없다고 투덜대지만 좋아서 하니 가장 멀리서 일찍 출근하는 성실한 교사다.
시댁에서도 대접이 달라졌다. 사이버대학이지만 공부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나 보다. 아이들 가르치면서 화려함도 줄었고, 특히 선생님을 하는 게 기특했는지 시댁 모임에 가면 이뻐서 눈에서 꿀이 떨어진단다. 시누이가 학교선생님들이라 며느리도 선생님 된게 시어머니는 그저 좋으시다고 하신다. 바쁜 며느리 명절에도 힘드니 천천히 오라고 한단다. 친정에도 빨리 보내준다. 달라진 지위를 이양은 지금 실컷 누리고 있다. 시댁에서 이뻐하니 그동안 한도 다 풀리고 어른들이 했던 잔소리도 이해가 된다고 한다. 특히 우리 시어머니는 관상이 달라질 정도로 밝아졌다고 좋아하신다. 다 우리 며느리가 사람 만들었다고 한다. 못 말리는 우리 어머니시다.
나도 이양이 없었으면 이일을 해냈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 엄마들도 좋아해서 소개를 해주고 있다. 아이들은 이쁘고 친절할 선생님을 손꼽아 기다릴 정도로 인기가 많다. 지국장 발령으로 힘들 때 옆에서 힘이 되어주던 특등 교사다. 일 잘하는 교사가 있으니 지국 분위기도 바뀌는 게 눈에 띄었다. 새로 온 교사도 이양처럼 교육시켰다. 그랬더니 내 편이 생기면서 우리 지국은 변혁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다. 손발이 딱딱 맞는 교사 몇 명만 있어도 지국은 돌아간다. 다른 지국들 보면 그런 교사하나 없어서 힘들어 그만두는 지국장들을 많이 봤다. 나를 살린 이양과 이양을 살린 내가 한 팀이니 뭐가 무서울까 싶다. 앞으로 우린 계속 같이 가기로 했다. 좋은 모습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살자고 했다.
이양아~ 고맙다. 이선생님 이번달 마감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