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 대유행의 유산
mbti가 유행하기 전, 감성과 이성은 t와 f의 문제가 아닌 여성과 남성의 것이었다. 때문에 자아가 구체적으로 형성되던 중학생 시절부터 나는 늘 혼란스러웠다. 왜 나는 친구들과 같은 시점에 화가 나지 않을까? 왜 모두가 슬퍼하는데 슬프지 않을까? 지금 눈물을 흘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성장과정에서 나 때문에 서운하고 상처받는 사람들을 여러 명 만들고서야 비로소 세상이 원하는 사회성을 갖추게 되었다.
공감능력에 대해 늘 할 말이 많다. 심리학에서 ‘공감‘은 두 가지로 분류된다고 한다. 한 가지는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 정서적 공감‘, 그리고 ’ 인지적 공감‘. 내게 정서적 공감능력은 부족할지 모른다. 그러나 인지적 공감능력은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지적 공감은 학습으로 가질 수 있는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니 나의 학창 시절과 20대 초반은 인지적 공감 능력을 가지기 위한 고군분투였다. 내가 사이코패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사려 깊은 배려라 생각한다. 오로지 타인을 위한 학습을 평생에 걸쳐하고 있는 게 아닌가.
mbti의 등장 후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몇몇 사람들은 mbti얘기가 지겹다고, 과학적이지 않다고 비판하지만 내게 mbti는 구원자와도 같다. 더 이상 억지로 눈물 흘리지 않아도 t라서 이해받는 세상이 된 것이다. 내가 틀린 게 아니었다.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나 말고도 많다. 이것 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우리 가족은 나를 제외하고 모두 f성향을 가졌다. 때문에 커가면서 나는 가족들 사이에서 언제나 나 혼자만 동떨어져 있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가족들은 내게 서운함을 자주 토로했고 나는 그 감정을 100%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수용하려 노력했다.
중학교 시절, 사춘기를 맞이한 친구들은 자주 다투곤 했다. 나는 그중에서 늘 깍두기(?) 같은 존재였다. 아이들은 각자 친구들에게 가진 불만을 이야기했고 나는 그때도 역시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한 번은 무리에서 두 그룹으로 나뉘어 친구들이 싸우게 되었는데, 한 친구가 내게 ‘너는 그냥 우리랑 놀아도 되고 쟤네랑 놀아도 되고, 마음대로 해~‘라고 한 적이 있었다. 딱히 누구에게도 부정적 감정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그 친구는 알았던 것이다.
또 한 번은 한 친구가 내게 ‘너는 화를 어떻게 그렇게 잘 참아?‘ 하고 물었다. 그런 질문을 했다는 건 언젠가 내가 화를 낼 상황에 화를 내지 않고 넘어간 적이 있다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적은 없었다. 그래서 대답했다. ’ 화가 난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그런데 나는 안다. 화가 없지 않다는 걸. 다만 사람들이 여고생에게 기대하는 종류의 화는 없었을 뿐이다. 그걸 학교 졸업 후 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면서 알게 되었다.
세상에 intp 여성은 사실 많을 것이다. 모두 숨어 있을 뿐. 사회성을 기르며 내키지 않지만 타인이 기대하는 말을 해준다.
모두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intp 남성들과는 차이가 생긴다. 남성들은 상대적으로 가면을 쓸 필요가 적다. 오랜 고정관념으로 인해 남성은 감정적인 면을 보일 필요가 적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 억울하긴 하지만 뭐 어쩔 수 없지. mbti 신봉자들에게나마 이해받을 수 있게 된 걸로 만족한다, 물론 나 자신도 포함해서. 내가 나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mbti 유행의 가장 큰 장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