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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최집사 Nov 06. 2019

영화, 조크가 되다.

영화 <조커> 리뷰

근래 주변에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

호아킨 피닉스의 역대급 반전연기가 인상적인 영화 <조커>이다.

이 영화를 봤다는 지인들이 하나같이 '명작'이라고 추천했는데 꼭 한 마디를 덧붙였다.

"요새 우울하면 보지 말고."

요즘 기분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너무 궁금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건 그냥 가벼운 농담입니다


기대없이 이 영화를 봤다면 매우 많이 놀랐을 거고, 나처럼 잔뜩 기대하고 봤다면 약간 의아했을 것이다. 영화가 별로여서는 절대 아니다. 충분히 충격적이고 몰입되는 멋진 영화였지만 내가 기대했던것과 달리 진지한 작품이 아니라 놀랐을 뿐이다.

조커는 그냥 탄생하지 않았다. 가정환경, 사회환경, 나약한 인간의 내면이 만들어 낸, 즉 사회가 만들어낸 괴물이다. 아서라는 인물이 조커가 되기까지 그의 인생을 영화로 살펴보자면 사회고발물처럼 느끼기 쉬운 영화지만 막상 보고 나니 내가 생각한 만큼 진지한 영화는 아니었다.

사회고발이라고 하기에는 개연성이 부족한 부분도 많고, 감독이 묘하게 무너뜨려 놓은 현실과 상상의 경계들이 이 영화를 하나의 '조크'로 만들었다. 


마치 가진자들을 향한 가난한 고담시민들의 짜릿한 역전승부 한 판으로 끝나는 듯한 영화의 결말 속에, 조커는 고담시민들의 새로운 영웅이 된다. 이 영화는 차라리 히어로물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조커는 이 부조리한 사회를 뒤집어 엎고자 살인을 하고, 고담시민들의 영웅이 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꼴보기 싫은 사람들을 처리했을 뿐이다. 약물치료가 중단됐고,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와중에 코미디언이 되겠다는 야심찬 포부도 무시당한다. 그 와중에 술먹고 세상에 자기들이 제일 잘난 줄 아는 껄렁이 셋이 이유 없이 나에게 시비를 걸었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죽인다. 괴물 조커의 탄생은 불합리한 세상에 대한 혁명적인 반항이 아니라, 분풀이에서 시작되었다.

게다가 그가 죽인 인물들 중에는 가진자와는 거리가 먼 인물들도 있다. 평생을 효자노릇을 해왔던 자신을 학대하고 속였던 엄마. 그에게 총을 쥐어주고 해고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광대 동료. 이 두 사람만큼은 고담시의 약자였고,아서와 비슷한 형편이었지만 그저 그의 분노를 샀을 뿐이다. 


오히려 영화는 유쾌하다. 끔찍한 연쇄살인마로 변해가는 조커의 모습에 흠칫하다가도, 이제는 엣 유물이 되어버린 코미디 요소와 슬랩스틱이 튀어나오며 예상치 못한 곳에서 피식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병원 자동문에 머리를 박는 모습이나, 난쟁이 동료가 살인현장에서 벗어나과 하지만 키가 작아 문을 열지 못해 끙끙대는 모습은 말 그대로 '웃프다'. 

영화는 영화의 배경에 어울리는 오래된 코미디를 적절히 버무려, 우중충한 느낌이 가득한 영화 곳곳에 배치해두었다. 그렇게 이 영화는 조커가 만들어 낸 하나의 '조크'로 완성된다. 




현실인지, 망상인지 알 수 없는 순간들


이 영화의 묘미는 과연 뭉개져버린 현실과 상상(혹은 망상)의 경계라고 장담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는 정신질환을 앓고있는 아서에게 동화되고, 그와 함께 현실인지 상상인지 모르는 것들을 마주한다. 

아서가 첫 살인을 저지른 이후 마음에 담아두었던 옆집 여성을 찾아가 키스하는 장면으로부터, 이후 여자가 아서의 코미디 쇼에 찾아오고, 데이트를 즐기고, 어머니의 병원에 함께하며 사랑을 키워나가는 동안 관객들은 그것이 현실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곧 아서는 깨닫게 된다.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 낸 환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현실의 그는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고, 사랑하는 여자에게 공포이 대상일 뿐이라는 것을.


영화의 많은 순간들이 현실과 망상, 그리고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흐려져있다. 그의 엄마는 진짜로 토마스웨인의 연인이었을까. 아서는 진짜 그의 아들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엄마가 정신병자였던 것이 맞을까. 

심지어 마지막 장면을 보고 나면 지금까지 본 모든 것이 현실이었는지 조커의 망상이었는지조차 헷갈리게 된다.


단순하게 보면 조커가 연쇄살인을 저지르고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이전에 심리상담을 진행했던 여성과 다시 상담을 받게 된 것이 팩트 인 것 같다. 그런데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전에 심리상담을 진행하는 장면에서 조커는 상담사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갇혀 있었던 때가 훨씬 나았다"고. 그리고 그 대사 이후 아서가 정신병원으로 보이는 곳에 수감되어 방 문에 머리를 박는 장면도 등장한다. 하지만 이후 영화 어디에서도 아서가 과거에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는 것에 대한 정보는 없다.


만약, 앞전의 모든 이야기가 조커의 '망상'에 불과하다면, 현실은 이것이다. 아서는 지금 정신병원에 수감되어있고, 심리상담을 받고 있으며, 그러던 도중 앞전의 모든 이야기(자신이 사회에서 무시당하며 살아가다가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이후 연쇄살인을 저지르고 고담시민의 영웅이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가 그의 머리를 스쳐간다. 그리고는 마구 웃는다. 왜 웃는지 묻는 상담사에게 말한다. 


"재밌는 농담 하나가 생각나서요"


아주 통쾌하고 유쾌한 농담이 아닐 수 없다. 나를 비웃었던 놈들, 속였던 사람들, 그리고 내 말을 들어주고 있는 척 하지만 사실은 나에게 관심은 눈곱만큼도 없는 지금 눈 앞이 상담사까지 싸그리 심판하고, 당장 죽어도 아무도 모를 하찮은 루저 '아서'가 아니라 고담시민의 영웅 '조커'가 되는 망상.

그리고 그 농담을 실현하기 위한 첫 발자국으로 그는 신발에 누군가의 피를 잔뜩 묻히고 상담실을 나선다.




나를 대신해서 미쳐가는 아서


많은 관객들이 조커의 살인을 보면서 왠지 모를 희열을 느꼈다고 말한다. 나 역시 첫 살인에서 만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고되고 기분도 개같은데 저렇게 열받게하면 죽이고싶겠다. 그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조커라는 영화가 많은 이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있는 이유라고도 생각된다. 호아킨 피닉스의 소름끼치는 연기 덕도 있지만, 아서의 삶이 가히 안타깝고 팍팍하다는 점에서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꿈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고, 비록 재능은 없었을지라도 성실했고, 좋은 아들이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돌아오는 것이 시궁창일 때, 사람은 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아서는 그래서 그냥 미쳐버린 인물이다. 혼자 안타깝게 미치고 끝나는게 아니라 나를 미치게 만든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다양한 측면에서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죽창 앞에서는 너나 나나 모두 공평하게 한 방이야'라고 말하는 듯한 아서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누군들 그런 상황에서 '확 그냥 죽여버릴까'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겠는가. 그 솔직한 마음을 우리 대신 아서가 조커가 되어 마음껏 펼치고 다녔다.






최근 자신의 모텔 투숙객을 무참히 살해한 장대호에 대한 사람들의 독특한 반응이 인상적이다. 

그와 관련된 기사에는 다른 살인사건과는 달리 살인자 장대호를 옹호하는 댓글이 많다.

"아무리 생각해도 피해자가 죽을 짓을 했다"는 장대호의 발언에 '나도 서비스직에 일하면서 죽여버리고 싶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살인이야 잘못이지만 오죽하면 죽였겠냐.' 심지어는 그를 '현대판 조커'라고 칭송하는 글까지. 


영화 조커가 전하는 메시지가 연쇄살인을 정당화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는 일부의 목소리가 있다. 인정하지만, 분노할 필요는 없다. 이 영화는 하나의 농담에 불과하니까. 그냥 허튼 이야기 하나 들었다고 생각하고 훌훌 털어버리면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실제로 사람이 죽었다. 누군가는 조커를 건드린 죄로 무참히 살해당했고, 몸이 토막난 채한강에 버려졌다. 그리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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