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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최집사 May 10. 2020

확진자들의 사생활, 나는 궁금하지 않다.

잠잠했던 코로나 사태가 이태원 클럽 여파로 다시 불안감을 높이고 있다. 마스크로 인해 피부가 다 뒤집어지고, 퇴사 후 준비하던 여행들을 모두 잠정 미루게 된 나 역시 이 무책임한 자들에 의해 다시 나의, 모두의 불편함이 연장되었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대하는 언론의 태도는 어딘가 이상하다. 많은 부분이 잘못되었다고 느낀다. 일부 언론들은 성소수자 혐오 여론 조성에 앞장서고 있다. 성소수란 언제나 사회의 혐오 대상이었으나, 언론이 그러한 목소리를 더욱 부추길 때 혐오의 목소리는 더 큰 힘을 얻기 마련이다.


질병, 전쟁, 하다 못 해 생활 속의 아주 작은 혼돈의 사태에서 사람들이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혐오이다. 누군가를 탓하고, 공공의 적을 만들어 비방하면 일단 속이라도 시원하다. 전국민의 분노와 피로감이 극에 달한 상황인 만큼, 혐오는 그 스트레스를 해소할 명분이 된다. 하지만 속이 시원할지언정 혐오로는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 

대상이 약자일수록 혐오는 쉽다. 하지만 잊지 말자. 병에 걸리고 싶어 걸린 사람은 없다. 퍼뜨리자고 마음먹고 퍼뜨린 사람은 없다. 물론 증상이 발현 된 이후에 클럽을 방문했다는 점에서 용산구 66번째 확진자는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가 잘 했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아무리 코로나가 잠잠해지는 상황이었고 모두가 지친 상태었다고 해도, 최소한 몸의 이상을 느꼈을 때는 외출에 자제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가 성소수자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치 않다. 확진자들의 사생활은 방역과는 무관한 정보이다.

여전히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이었던 시기에, 밀접촉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클럽들이 모두 운영을 했다는 점에서 당국과 점주들의 예방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클럽에 간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2미터씩 서로 거리를 유지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번 사태에서 가장 실망감을 안겨 준 것은 역시 언론들의 행태다. 언론은 이태원 클럽에서 확진자가 나오자마자 확진자들의 성정체성을 자극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갔던 곳이 모두 성소수자 전용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그곳에서 어떤 식의 만남이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자극적인 보도를 이어갔다. 기사를 보며 생각했다. 내가 왜 그것을 알아야 하는가. 

사람들은 반응했고, 곧바로 역겹다, 끔찍하다, 다 죽었으면 좋겠다며 혐오의 말을 필터링 없이 내뱉었다. 그들이 확진자를 혐오하는 이유는 그가 증상이 있었음에도 클럽에서 놀았다는 사실에서, 그가 성소수자일 것이라는 확신으로 바뀌고 있다. '이 김에 게이들을 처단해야 한다.', '동성애는 정신병이다. 그들을 인정해줄 수 없다.'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그래, 정확히 신천지 사태와 유사하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이 사태에서 사회가 확진자의 사생활인 '성정체성'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혐오 뿐이다. 




(기사제목) 글쎄 내가 이걸 왜 알아야하냐고요




성정체성에 대한 아웃팅은 본래도 폐쇄적이었던 이들을 더욱 음지로 숨게 만들 뿐이다. 이미 사태는 벌어졌고, 철저한 후속 방역과 접촉자 확인에 주력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런식의 언론보도는 확산 방지에 도움이 될 것이 하나도 없다. 아웃팅은 폐쇄적인 조직을 더욱 폐쇄되도록 만들며, 폐쇄 될 수록 전염병에 취약한 조직이 된다. 

혹자는 왜 당당하지 못하냐고 일침을 놓던데, 글쎄. 성소수자에 대한 따가운 시선이 만연한 사회에서 그들에게 당당하게 어깨 펴고 다니라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더 큰 폭력이 아닌가. 


우리가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은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에 클럽과 유흥업소가 무방비 상태로 영업을 했고, 많은 이들이 안일한 마음으로 그곳에 갔다는 것이지, 클럽에 간 사람들의 성정체성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 이상 지역사회로 퍼져나가지 않도록 접촉자들을 빠르게 찾는 것과, 두 번 다시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것 뿐이다. 이번 사태가 성소수자 혐오로 방향을 틀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소수자를 혐오하지 말 것에 이런 현실적인 이유를 덧붙여야 하는 상황이 속상하지만.


우리나라의 방역체계가 전세계에 극찬을 받고 있다. 그 가운데 정말 잘 하고 있다고 평가받는 부분이 확진자의 동선파악과 접촉자 파악이 빠르고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인데 그 덕에 코로나 사태로 가장 위험한 나라였던 대한민국이 오히려 좋은 방역 모범 사례로 꼽히게 된 것임은 인정해 마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 과정에서 종종 확진자들이 머물렀던 장소가 아닌 확진자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춰지곤 했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방역을 위해서는 사실 그들이 다녀간 장소 외에는 모든것이 불필요하다.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성소수자인지는 중요치않다. 확진자가 며칠 몇시에 클럽을 들렸고, 영화관에 들렸으며, 무엇을 타고 귀가했는지를 밝히고 그와 동선이 겹치는 사람들을 찾아내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확진자가 여성이었는지 남성이었는지, 몇 살인지, 학생인지 직장인인지가 더욱 강조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 사태에서는 너무나도 명확하게 확진자들의 '성정체성'이 강조되고 있다. 그들이 머물렀던 장소가 곧 그들의 성정체성을 직관적으로 명시하는 공간이라 해도, 언론에서 앞다투어 확진자들의 사생활을 강조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무책임하다고 까지 말 할 수 있다. 


코로나 19와 같은 접촉성 감염병을 효율적으로 막기 위해서는 '사람'이 아닌 '장소'에 주목해야 한다. 그 외의 사생활은 언급할 필요가 없다. 사생활에 대한 이슈몰이는 올바르지도 않으며, 효율성도 낮다. 동선을 숨기거나 거짓 정보를 전달하는 등 감염병 예방을 방해하는 개개인의 행태는 법적인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지만, 언론에서 지나치게 많은 것을 밝혀 확진자들로 하여금 사생활 침해에 대한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도 옳지 않다. 언론 뿐 아니라 국민들도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나에게 정말 필요한 정보가 무엇인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코로나 사태가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를 심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 성숙한 대한민국을 만들어가는 계기가 되기를, 그리고 성숙한 국민들의 의식만큼이나 언론 역시 언론의 책임을 다하고 성숙한 보도 윤리를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나는 확진자들의 사생활이 전혀 궁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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